"아이 던지고 뛴 父, 오죽하면"…열린 방화문이 성탄절 비극 키웠다
"어제 가래를 보니 새까맣더라고요. 가슴도 답답해서 병원에 가려고요."
크리스마스 연휴가 끝난 26일 오전 10시쯤 서울 도봉구 방학동 아파트 화재 현장에서 만난 송모씨(62)는 이같이 말했다. 불이 난 건물 6층에 거주하는 송씨는 "아내, 아들과 함께 집에서 잠을 자다가 유독가스 냄새가 너무 심해 나가지도 못하고 기다리고 있었다"며 "대피하라는 방송이 나오긴 했지만 어디로 대피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아) 몰랐다"고 밝혔다.
16층에 거주한다는 윤모씨(55)는 "연로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데 당시 관리사무소에 전화했을 때 나가지 말라는 안내를 받았다"며 "공기청정기를 틀고 물수건으로 입을 막은 채 기다렸다. 뭔가 터지는 소리는 듣지 못했고 전기장판이 합선된 건지 종이 타는 냄새랑은 또 다른 냄새가 났다"고 했다. 윤씨는 전날 마신 연기 탓에 두통을 호소에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해당 아파트 3층에서 지난 25일 오전 4시57분쯤 시작된 불길은 최초 신고 후 약 4시간만인 오전 8시40분쯤 완전히 꺼졌다. 이 사고로 30대 남성 2명이 숨지고 3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이날 오전 11시부터 3시30분쯤까지 합동 감식을 진행했다. 헬멧과 장화, 마스크 등을 착용한 합동 감식 관계자 열댓명이 출입통제 라인을 지나 아파트 내부로 들어가 화재가 최초 발생한 301호를 살펴봤다. 주민들과 시민들은 출입통제 라인 앞에서 자리를 잡고 침묵하거나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합동 감식을 지켜봤다.
경찰 관계자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다양한 요인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겠다"며 "감식 결과를 토대로 명확한 사고 원인을 규명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사망자가 발생한 만큼 추가 조사도 필요할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사고 당시 아파트 내부 방화문이 모두 열려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파트 1층이 개방형인 필로티 구조로 돼 있어 공기가 빠르게 유입된 점도 화재를 키운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당시 화재경보기는 정상적으로 작동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정확한 화재 원인 등을 포함한 감식 결과를 3주쯤 뒤 발표할 예정이다.
경찰은 이날 감식과 별개로 숨진 이들에 대한 부검을 진행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은 자녀를 안고 뛰어내려 숨진 박모씨(33)에 대해 '추락에 의한 여러 둔력 손상', 화재를 최초 신고하고 위층에 화재를 알리러 올라가다 숨진 채 발견된 임모씨(38)에 대해 '화재 연기 흡입에 의한 화재사'라는 부검 1차 소견을 전했다. 경찰 관계자는 "범죄 혐의점 등은 발견되지 않았고 조직, 독극물 검사 등을 진행한 후 최종 사인 결론을 낼 방침"이라고 밝혔다.
화재가 발생하기 전 경비원들은 제설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해당 아파트 경비원 A씨는 "새벽 4시부터 제설 작업을 했는데 제설 작업을 하면 넉가래로 눈을 치우는 소리가 나기 때문에 화재 당시 '펑' 터지는 소리 같은 다른 소리는 못 들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경비원 B씨는 "제설 작업을 하다가 두툼한 포대를 들고 급하게 화재 현장으로 가 다른 사람과 나란히 포대를 들고 구조 작업에 나섰다"고 밝혔다.
이날 감식 현장에는 이웃 주민들이 찾아와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했다. 방학동에 거주하는 김모씨(70)는 "이 근처에 20년 넘게 살았는데 여기 살면서 이렇게 큰 사고가 난 건 처음"이라며 "크리스마스에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상상도 못했다. 너무 짠한 마음에 현장에 와 봤다"고 말했다.
강북구 수유동에서 왔다는 이모씨(69)는 "불은 끌 수 있고 망가진 건 수리하면 되는데 사람이 죽은 건 어쩔 수 없으니 정말 안타깝다"며 "아빠가 아이를 던지고 뛰어내렸다는데 오죽하면 그랬겠냐"고 했다.
구청은 화재가 발생한 아파트에 통합지원본부를 설치하고 사고 직후 아파트 경로당에 임시 대피처를 마련했다. 화재로 집을 잃은 이들의 임시 거주지는 관내 3개 숙박업소로 정해 제공 중이다. 현재 8세대 정도가 임시 거주지에 머물고 있다.
한편 처음 불이난 3층 호실은 지난해 8월23일 서울북부지법에서 임의경매 개시가 결정된 후 올해 들어 두차례 유찰된 것으로 밝혀졌다. 해당 호실 창문에는 평소 정치적인 문구 등이 적힌 A4 용지가 붙어 있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주변 주민들은 "평소 조금 특이한 집이라는 소문이 있었다"고 전했다. 해당 호실에 거주하는 70대 김모씨 부부는 화재 직후 구조됐다.
경찰 관계자는 "거실에 인접한 작은 방에서 최초 발화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며 "전기적 원인에 의한 발화는 아니고 방화의 가능성도 높지 않다. 부주의에 의한 화재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조사를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최지은 기자 choiji@mt.co.kr 박상혁 기자 rafandy@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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