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재선, 연방대법관 9명 손에 달렸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내년 대선의 향방을 좌우할 '태풍의 눈'으로 다시 떠올랐다. 연방대법원은 2000년 대선 때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후보와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가 플로리다주 재검표를 놓고 제기한 소송전에서 부시 후보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고어 후보는 전체 득표율에서 앞섰지만 플로리다주에서 단 537표 차로 패하자 주대법원에 재검표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고, 주대법원은 이를 허용했다. 하지만 연방대법원은 플로리다주 대법원의 재검표 허용이 헌법상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이를 중단시켰다. 당시 진보 성향인 샌드라 데이 오코너 대법관이 부시 후보의 편을 들면서 5 대 4로 결론 났고, 부시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됐다.
콜로라도주 대법원, 트럼프 출마 금지 판결
수정헌법 14조 3항은 헌법을 지지하기로 맹세한 공직자가 모반이나 반란에 가담할 경우 다시 공직을 맡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은 1868년 남북전쟁 이후 남부 정권에 가담했던 인사들의 공직 임용을 막기 위해 제정됐는데, 대선 후보 자격 박탈에 인용된 것은 처음이다. 다만 주 대법원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연방대법원에 상고할 수 있도록 이번 결정의 효력을 내년 1월 4일까지 유예한다는 단서 조항을 달았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상고한 만큼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판결의 효력이 미뤄진다. 콜로라도주에서 실시되는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의 승패는 '슈퍼 화요일'로 불리는 내년 3월 5일 좌우될 전망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콜로라도주 이외 25개의 주에서도 비슷한 소송에 걸려 있다. 이번 판결이 다른 소송에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워싱턴포스트(WP)는 "다른 주 법원에서도 콜로라도주 대법원과 같은 결론을 내리면 트럼프가 공화당 경선과 내년 11월 대선에서 승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연방대법원은 1월 6일 의회 난입 사태가 내란인지, 트럼프 전 대통령이 가담했는지, 수정헌법 14조 3항이 규정한 공직에 '대통령직'도 적용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판단을 내려야 한다.
연방대법원 대법관들의 면면을 보면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상당히 유리하다. 연방대법원 대법관 9명의 성향을 보면 보수가 6명, 진보가 3명이다. 특히 보수 성향 대법관들 가운데 3명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임명했다. 연방대법원은 그동안 임신중지(낙태)권 폐기 판결, 소수인종 대입 우대 정책(Affirmative Action) 위헌 판결 등 보수적인 판결을 내려온 만큼 콜로라도주 대법원 판결도 연방대법원에서 뒤집힐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새뮤얼 이새커로프 미국 뉴욕대 로스쿨 교수는 "연방대법관들은 투표장에서 유권자의 선택을 제한하는 데 극히 꺼릴 것"이라며 "트럼프 전 대통령의 상고를 받아들일 것으로 전망한다"고 말했다.
연방대법원이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출마 자격이 없다고 판결할 수도 있다. 데이비드 베커 선거혁신연구센터 대표는 "연방대법원은 2024년 대선에서 부시 대 고어 사건보다 더 큰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수정헌법 제14조 3항에 걸린 트럼프
조 바이든 대통령은 콜로라도주 대법원의 판결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트럼프가 확실히 반란을 지지했다"며 "그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강조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출마 제한에 대해 "연방대법원의 결정에 달려있다"고도 밝혔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뒤지고 있는 바이든 대통령은 콜로라도주 대법원의 판결을 기회 삼아 정치 공세를 높여 지지율 반등을 노리고 있다. 하지만 미국 정치권에서는 이번 판결이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더 끌어올리는 호재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최근 연방대법원이 트럼프 전 대통령의 손을 들어준 사실도 트럼프 캠프를 환호하게 만들고 있다. 연방대법원은 12월 22일 1·6 의회 난입 사태 선동 혐의에 대한 수사를 맡은 잭 스미스 특별검사의 면책특권 판단 청구에 대해 기각 결정을 내렸다. 스미스 특검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통령 재직 시절 저지른 범죄 혐의에 대해 연방법상 '완전 면책특권'이 있는지를 가리는 재판 일정을 패스트 트랙으로 진행해 달라고 연방대법원에 요청했었다. 연방대법원은 항소 재판 등 통상적인 절차를 밟아 재판을 진행해야 한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재판은 면책특권 여부에 대한 지루한 법정 공방 뒤에나 열릴 예정이다. 이에 내년 3월 4일로 잡혔던 트럼프 전 대통령의 1·6 의회 난입 사태 선동 혐의에 대한 재판 일정도 늦춰질 전망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관련 재판을 내년 대선 이후로 미룰 수 있게 되면서, 대선 전에 재판을 끝내려던 특검의 계획이 타격을 입은 것이다. 미국 언론들은 연방대법원이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을 볼 때 콜로라도주 대법원의 판결이 번복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고 있다.
커지는 사법 리스크
백악관 기밀 유출 사건은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처벌 전례도 많아 유죄 입증이 가장 쉬울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연방수사국(FBI)이 트럼프 전 대통령 별장 등에서 확보한 문건, 트럼프 전 대통령이 손님들에게 기밀을 보여 주며 자랑하는 내용이 담긴 녹취록 등 관련 증거도 많다. 하지만 연방 사건은 유죄 판결이 나와도 대통령 권한으로 스스로를 사면할 수 있다. 실제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차기 대통령이 되면 본인을 사면하겠다는 뜻을 측근들에게 공공연히 밝혀 왔다. 이른바 '셀프 사면'이 법 원칙에 위배되는 가에 대해서는 법학자들 간에 의견이 갈린다. 이 문제도 연방대법원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지방 사건의 경우 상황이 다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16년 대선을 앞두고 포르노 배우에게 성추문 입막음 돈을 지불한 혐의로 뉴욕주 법원에 기소됐다. 조지아주 법원에서도 2020년 대선 결과 번복 시도 혐의로 기소됐다. 미국 대통령은 주의 검찰관들을 해고할 권한이 없다. 따라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하더라도 이 사건들은 종결시킬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주 법률에 따라 제기되는 형사 사건 결과 역시 대통령이 사면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4개 사건 91개 혐의를 모두 부인하면서 '사법 리스크'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특이하게도 사법 리스크가 불거질수록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공화당 지지층의 지지율은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미국 언론들은 내년 대선에서 사법 리스크가 중도층과 무당층으로의 확장을 제약할 수 있어 트럼프 전 대통령에겐 악재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연방대법원이 콜로라도주 대법원의 판결을 번복하더라도 이에 대한 여론의 향방에 따라 내년 대선 결과가 다르게 나올 수도 있다.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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