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 칼럼] ‘상생’의 수렁에 빠진 대한민국 금융
독재국가에서 가능한 일이 대한민국에
상생이 뒤흔든 금융의 공정과 정의
포퓰리즘이 가져올 금융의 미래는 참담하다
은행권이 1조6000억원 규모의 개인사업자 이자환급(캐시백)을 비롯해 자영업자·소상공인 등 취약계층에게 모두 ‘2조원+알파(α)’를 지원하기로 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은행 비판과 횡재세 논란으로 다시 시작된 상생금융 시즌2의 결과다.
금융 당국 수장들과 20개 은행장들은 한 데 모여 이번 성과를 상찬하며 손뼉 쳤다. 민간기업인 은행이 2조원 넘는 돈을 토해내고 금융 당국 수장과 은행장들이 모여 박수를 치는 광경은 참으로 괴기하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 중 은행들이 자발적으로 2조원을 내놨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단언컨대 없었을 것이다. 자유시장경제체제가 정체성인 국가에서 벌어져선 안 될 일이다. 규모나 지원 방식이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라 관치라 부르기도 낯부끄럽다.
이번 상생금융 시즌2가 가져올 대한민국 금융의 미래는 참담하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건전성을 해치지 않는 최대한의 범위’에서 지원 방안을 마련했다고 했다. 이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이 되어 두고두고 은행들을 괴롭힐 게 분명하다. 앞으로 은행은 매 정권마다 건전성을 해치지 않는 최대한의 범위에서 수익을 토해내란 요구를 받아도 거절할 명분이 없어졌다. 미래 불확실성에 대비해 충당금이라는 안전망을 쌓는 데 쓰일 돈이 사회공헌이라는 이유로 빠져나갔으니 그만큼 은행의 기초체력도 약해졌다.
지원 방식은 금융시장의 근간을 흔든다. 은행권은 연 4%가 넘는 금리로 대출을 받은 개인사업자 약 187만명에게 평균 85만원의 이자를 환급하기로 했다. 그런데 차주의 소득이나 자산에 대한 기준이 없어 수익이 많은 ‘부자 사장님’도 이자 환급을 받을 수 있다. 신용관리를 잘해 저금리로 대출을 받았거나, 성실하게 대출을 상환한 자영업자는 대상이 아니다.
한국 금융경제는 신용평가제도라는 약속을 근간으로 작동한다. 신용등급이 높은 고객은 낮은 금리로 대출받고, 그렇지 않은 고객은 높은 금리로 대출을 받아야 한다. 이 약속이 금융권 리스크 관리의 핵심이다. 그래서 우린 싫어도 이 약속은 지켜나간 것이다. 상생금융 시즌2는 이 약속을 뒤집어 성실하게 신용관리를 하면서 대출 원리금을 갚아나간 이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줬다. 금융시장에 공정함이 결여됐는데, 미래를 얘기하는 것은 사치다.
이번 상생금융은 우리가 가진 자영업자 문제를 고작 몇 개월 이연할 뿐이다. 올해 자영업자 폐업률이 전년 대비 30%가량 증가했다고 한다. 그만큼 자영업자들은 최악의 보릿고개를 지나고 있다. 자영업자 줄폐업의 원인은 첫째 공급과잉이고, 둘째 경기 침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우리나라의 전체 취업자 대비 자영업자(무급 가족 종사자 포함) 비율은 23.5%였다. 취업자 10명 중 2~3명은 자영업자란 얘기다. 선진국들은 대부분 이 비율이 10% 미만이다.
자영업자 간 경쟁이 치열한데 고금리·고물가에 따른 경기 침체로 장사도 안되니 눈물로 폐업을 결정한다. 은행 주머니에서 돈을 털어 손님이 없는 가게 사장님 주머니에 찔러준다고 이 문제가 해결되나. 그저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하는 것에 가깝다. 꾸준한 소득이 있는 자영업자는 계속 영업활동을 위한 유동성 지원을 하되 그렇지 못한 자영업자는 채무재조정, 폐업지원, 일자리 교육 등 출구를 마련해줘야 한다. 이것이 정부와 금융권이 할 수 있는 자영업자 상생금융이다.
상생금융 시즌2를 보며 금융의 본질을 생각했다. 은행업의 본질은 자금 중개다. 고객으로부터 잉여 자금을 수신 형태로 위탁받아 수요자에게 여신 형태도 제대로 배분하는 것이다. 이때 이자라는 것이 발생한다. 은행에서 자금을 빌린 자는 이자를 내고 돈을 위탁한 자는 이자를 받는다. 대통령과 금융 당국 수장이 은행 사회공헌을 종용하며 명분으로 내세운 ‘이자 장사’가 결국 은행업의 본질 중 하나다.
금융위원회는 공정한 금융 룰을 만들어 시장에서 작동할 수 있도록 하고, 금융감독원은 적절한 규제·감독으로 금융 리스크를 관리하는 것이 존재 이유다. 은행 곳간을 털어 없는 자들에게 나눠주는 의적(義賊)은 금융 당국의 역할이 아니다.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와 같은 대기업 팔을 비틀어 2조원을 토해내게 했다면 국민은 정부를 향해 박수 대신 비판을 퍼부었을 것이다. 오너만 없을 뿐, 은행도 엄연히 민간기업이자 상장사다. 틈만 나면 상생 명목으로 은행 주머니를 털면서 삼성전자 같은 글로벌 은행이 한국에는 왜 없냐고 호통치는 것은 위선이다. 이 악습을 끊을 결심을 하는 이에게 기꺼이 박수를 보내겠다.
[송기영 금융1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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