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건汶楗 풍수유람] 40. 만보(漫步), 대전현충원

손건웅 2023. 12. 26.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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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동 국립묘지의 안장능력이 한계에 이르자 정부는 1976년 4월 충남 대덕군 유성읍 갑동리(현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의 현 위치에 대전국립묘지를 설치할 것을 결정했다. 1979년 4월부터 공사를 본격 착수하여 1985년 11월 13일 전체 면적 약 322만㎡(97만 4천평)의 현 국립대전현충원을 준공하게 된다. 공사기간 중이던 1982년 8월 27일부터 안장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국립대전현충원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산화하신 호국영령 및 순국선열을 모시고 그분들의 생전의 업적을 추모하고 있다.
  
 대전현충원은 문필봉을 조종산(祖宗山)으로 옥녀봉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있으며, 명산인 계룡산을 태조산(太祖山)으로 삼고 있다. 택리지에 의하면 태조산인 계룡산은 삼각산, 오대산, 구월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4대의 역량 있는 큰 터 중 하나라고 한다.형상이 붓끝같은 문필봉은 불길이 이는 듯 성역을 두루 비치고 있는 듯하다. 문필봉에서 다시 솟구쳐 내린 옥녀봉은 옥녀가 금반(金盤)을 대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처럼 대전현충원의 지형은 계룡산의 맥을 이어 받은 문필봉과 옥녀봉을 정점으로 병풍처럼 둘러친 좌우능선이 좌청룡·우백호를 이루고 있어 묘역으로 아주 이상적인 명당(明堂)자리라 하겠다. (출처 : 대전현충원)
 

 어떤 마을이나 특정 지역을 묘사할 때는 총론적으로 위와같은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설명하는데, 각론으로 살펴보면 앞집과 뒷집, 각각의 자리가 길흉의 차별이 있기 마련이다. 예컨대, 풍수명당으로 유명한 안동 하회(河回)마을도 각각의 집들이 길흉과 풍수파워의 대소가 다르다.
 각론적 관점으로 대전현충원을 만보(漫步)하면서 돌아봤다.
 

해군대령 이흥섭(병무청장 이기식 부친)묘소. 2013년 별세 및 안장. 

해군대령 이흥섭(병무청장 이기식 부친)묘소. 2013년 별세 및 안장. 
이흥섭은 해사 4기로, 6.25 당시 생도신분으로 미그기를 격추시켰다. 생도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그의 장남 이기식도 해사 35기로 해군의 주요 보직을 거쳤고 중장 때에는 해군작전사령관을 역임하고 전역했다. 그리고 2022년 윤정부의 초대 병무청장에 임명되었다. 이기식의 부인도 해군본부에서 근무하다 대령으로 예편했다. 삼남 또한 해사출신으로 예비역 해병대 중령이니 해군 병역의 명가라 불릴만 하다. 차남 이기정은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금년 3월에 한양대학교 총장에 선임되어 가문의 영광을 더하였다. 

 

이흥섭 대령의 묘소

이흥섭 대령의 묘소는 13회절 명당에 정확히 모셨다. 이대령이 2013년에 별세하고 장남이 7개월 만인 그해 10월에 중장으로 진급하였으니 금시발복(今時發福)의 명당이라해도 괜찮을 것이다. 묘소의 풍수파워는 장관이나 국회의원을 배출하기에 손색없는 역량으로 자녀들의 인생 말년을 스퍼트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애국지사 이규학(광복회장 이종찬 부친)묘소

 애국지사 이규학(광복회장 이종찬 부친)묘소. 1973년 별세, 1988년 안장. 
이규학은 우당 이회영(李會榮)의 차남으로,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성 이항복의 11대손이다. 가히 조선을 대표하는 명문가 후손이다.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무장독립투쟁과 임시정부 수립에 기여하였다. 1996년에 별세한 부인 조계진 여사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외손녀로 광복회원이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중국 상해공항에서 백범을 비롯한 임정요원들은 기념비적인 사진을 남겼다. 맨 앞줄 가운데, 태극기를 들고 있는 소년이 이종찬이다. 조계진 여사도 자리에 함께했다.

 

 12회절 명당에 모셨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통설의 예외적인 사례이다. 정통성이 부족한 5공 정권은 우당선생의 손자인 이종찬을 차출했고, 그는 서울 종로에서 국회의원 4선을 역임했다. 또한 김대중 정부에서는 초대 국정원장을 역임했다. 이종찬의 영달에는 우당의 후광에 명당의 풍수파워가 더해졌다는 생각이다. 같은 할아버지의 후손이라도 부모 묘를 어디에 모셨느냐에 따라 4촌간에도 명운이 달라지는  사례가 많다. 경주 이문(李門)의 삼성가가 그렇고 우당의 후손 또한 그러한 사례이다.
 

애국지사 박종식(전 국정원장 박지원 부친)묘소.

 애국지사 박종식(전 국정원장 박지원 부친)묘소. 1948년 별세. 2017년 7월 안장. 
박지원은 1980년대 초 미국에서 성공한 사업가였다. 1983년, 미국으로 망명한 DJ를 만난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1987년 DJ가 사면·복권되자 사업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1992년 제 14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전국구)이 되었으나 1996년 15대 총선에서는 김문수에게 고배를 마신다. 그러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자 공보수석, 문화관광부 장관,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2006년에는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이후 2008년 목포에서 연속 3번 당선되어 4선의원이 되었다. 

 

 14회절 명당에 모셨다. 대전현충원에서 본 상등급 명당이다.
필자는 2012년 이후에 진도에 있는 박지원 선영을 몇 차례 간산했다. 박지원은 명당에 모신 조부모 묫바람으로 현달했지만, 흉지에 모신 부모님 묘소는 걸림돌로 작용했었다. 2020년 1월, 뜻밖에도 현충원으로 이장한 박지원 부모 묘소를 보았다.  묘소의 풍수파워가 좋아 “누구도 박지원을 넘기는 어려울 것이다”고 예측했다. 그러나 4월의 총선에서 박지원은 석패한다. 민생당 간판으로 출마한 정동영·천정배·손학규 등의 정치 거물들도 낙마했다. 필자의 예측이 틀리자 맥로이론도 입방아에 올랐다. 그런데 석 달 뒤, 박지원은 국정원장에 임명된다. 대선정국에서 자신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사람을 요직에 발탁한 문재인의 포용력이 돋보였지만, 명당으로 이장한 묫바람이 제대로 작동했다는 판단이다. 2024년 22대 총선에 출사표를 던진 박지원, 옥토지네리언(octogenarian)의 신화를 만들어낼 것인가.

 

육군대장 백선엽 묘소.

 육군대장 백선엽 묘소. 2020년 7월 별세 안장. 
백선엽(白善燁, 1920 ~ 2020년)은 6·25 전쟁의 영웅과 독립군을 토벌한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상반된 평가가 공존한다. 현충원 안장 시에도 논란이 분분했다.
 그는 만주국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군 토벌대인 간도특설대에 장교로 복무했다. 인생의 오점을 남겼다. 그가 6·25전쟁에서 낙동강 전선을 지켜내자 전쟁영웅으로 불리게 되었다. 기실 그 넓은 전선을 지켜낸 업적은 국군과 미군의 장병들의 몫이라는 주장도 여전하다. 그는 1952년에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고 1953년에 한국군 최초의 4성장군이 되었으니 그의 나이 33세였다. 1960년에 전역했다.
1960년대 중반, 형제의 이름을 따서 설립한 인천의 선인학원은 국대 최대의 사학이었으나 정권의 비호아래 사학비리의 온상으로 불리기도 했다.

 

백장군 묘소 앞의 주차장.

 백장군 묘소 앞의 주차장. 노란색 원이 필자가 판단하는 대전현충원의 핵심 주혈디다. 백장군 묘소는 이에 상응하는 면배의 배(背)에 모셨다.
 필자는 10여 년 전, 대전현충원 북쪽으로 70여 킬로 떨어진 사설묘원에서 백장군 가족 묘를 간산한 적이 있다. 동생 백인엽과 모친 그리고 그리고 백장군의 수묘(생존시에 만들어 놓은 묘소)가 있다. 모친과 백장군 묘소는 상당한 명당이었다. 현충원 안장은 망자의 유언이었는지, 후손의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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