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세대가 끌어올리는 한일 콘텐츠와 문화 [김희경의 컬처 인사이트]
도쿄돔은 일본 최대 규모의 실내 공연장으로, 객석 수가 총 4만 석에 달한다. 일본 아티스트는 물론 전 세계 많은 아티스트들에겐 ‘꿈의 무대’로 꼽힌다. 그런데 이곳에선 최근 K팝 음악이 연이어 울려 퍼지고 있다. 지난 12월 9일엔 KBS ‘2023 뮤직뱅크 글로벌 페스티벌’이 12년 만에 도쿄돔 무대에 올랐다. 앞서 지난 11월엔 CJ ENM의 K팝 시상식 ‘MAMA AWARDS’가 국내 시상식 최초로 도쿄돔에서 개최됐다. 내년 2월엔 SM엔터테인먼트 소속 아티스트들이 이곳에서 ‘SMTOWN LIVE’ 공연을 펼친다. 이곳에서 K팝 공연이 열리면 많은 객석에도 매번 매진 행렬이 이어져 큰 화제가 되고 있다. K팝뿐만 아니다. 일본에선 드라마, K뷰티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한류가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한국에서도 이전과 다른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지난 10월 기준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 이용객은 186만 명에 달했다.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같은 기간(104만 명)에 비해 78% 늘었다. 엔저 현상 등의 영향도 있지만 도쿄, 교토 등 일본 주요 도시를 여행하고 다양한 문화를 즐기고자 하는 수요가 크게 증가했다. 덩달아 일본 콘텐츠를 찾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올 한 해 ‘스즈메의 문단속’, ‘더 퍼스트 슬램덩크’ 등 일본 애니메이션은 국내 극장가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일본의 인기 애니메이션 ‘최애의 아이’ OST 등을 부른 밴드 ‘요아소비’가 지난 12월 17일 서울에서 개최한 콘서트엔 8000여 명이 몰려 떼창을 불렀다.
한국과 일본, 양국에선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한때 한국에선 일본 제품에 대한 불매 운동인 ‘노 재팬(NO JAPAN)’ 움직임이 나타났으며, 일본에선 한국인과 한국 문화를 배척하는 ‘혐한’ 분위기가 강하게 조성됐었다. 하지만 최근엔 분위기가 크게 달라졌다. 대신 서로의 문화를 경험하고 소비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같은 변화의 결정적인 요인은 무엇일까. 앞으로도 이런 분위기는 지속될 수 있을까.
새로운 세대, 새로운 플랫폼이 동력
달라진 분위기를 주도한 이들은 양국의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이다. MZ세대는 이제 전 세계에서 문화 소비의 중심축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문화 소비를 할 때 특별한 편견 없이 선택을 하고 감상한다. 국적, 인종, 성별 등은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다. 재미와 감동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또한 양국의 첨예한 역사 문제, 국제정치적 이해관계와 문화 소비는 별개의 영역으로 인식한다. 문화는 본능과 감성의 영역이지만, 역사와 국제정치는 이성의 영역에 있다. 그렇다 보니 최대한 분리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일본 MZ세대가 한류를 즐기는 이유엔 부모 세대의 영향도 크다. 이들의 부모 세대는 2003년 일본 NHK에서 방영됐던 드라마 ‘겨울연가’를 보고 K콘텐츠의 매력에 흠뻑 빠졌던 세대이다. 그렇게 MZ세대는 당시 부모가 한국 문화에 열광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이후에도 한국 문화를 즐기거나 특별한 편견 없이 대하는 것을 바라보며 자랐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한국 문화에 대한 호감도가 높고 스스럼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나아가 일본 MZ세대는 역으로 부모에게 최근에 나온 한국 콘텐츠를 소개하며, 다시 한류 열풍에 올라타도록 유도하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 덕분에 일본에선 다양한 세대가 함께 한류를 즐기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다양한 콘텐츠 소비를 하게 된 것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존엔 양국의 콘텐츠 중 일부만이 유통됐다. 하지만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통해 다수의 콘텐츠가 실시간으로 유통되며 관심도 자체가 높아졌다. 특히 일본에선 팬데믹 동안 OTT 이용자가 늘며 한국 콘텐츠를 즐기는 사람이 급증했다. 당시 일본 시청자들은 글로벌 OTT 넷플릭스를 통해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이태원 클라쓰’ 등을 접하고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런 현상은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쳐 K콘텐츠 열풍을 지속시키는 큰 동력이 되고 있다. 12월 셋째주 기준, 일본 넷플릭스의 TV쇼 부문엔 ‘마이 데몬’, ‘웰컴투 삼달리’ 등 다수의 한국 드라마들이 상위권에 올라가 있다. K팝도 비슷한 경로를 거쳐 널리 확산됐다. 일본 MZ세대는 유튜브를 통해 화려한 무대와 세련된 춤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여러 K팝 아이돌 그룹을 접하게 됐고, K팝에 더욱 열광하게 됐다. 올해 1~10월 음반 수출액은 2억4381만 달러(약 3183억원)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는데, 그중 수출국 1위는 일본이었다.
한국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동안 한국 내에서 일본 콘텐츠의 영향은 미미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막혀 있던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개방을 허용한 지 25년이 흘렀지만, 생각보다 파급효과는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의 ‘서브컬처(하위문화)’ 수준에 머물 뿐이었다. 하지만 최근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올해 한국 영화가 고전하는 사이 극장가를 ‘스즈메의 문단속’과 같은 일본 애니매이션이 점령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콘텐츠 시장의 주류로 떠오른 일본 애니메이션의 인기엔 플랫폼의 영향도 컸다. OTT를 통해 ‘귀멸의 칼날’ 시리즈, ‘주술회전’, ‘최애의 아이’ 등 다양한 일본 애니메이션을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경쟁과 동시에 문화적 교류도↑
대대적인 세대 교체, 글로벌 플랫폼을 통한 콘텐츠 유통에 힘입어 이 같은 현상은 앞으로도 지속될 전망이다. 특히 일본 내 한류는 더욱 막강한 파급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도쿄돔처럼 일본 내에 많은 대형 공연장이 생긴 것도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 K팝은 강력한 티켓 파워를 자랑, 대형 공연장 객석을 가득 메울 만한 소프트웨어로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K팝은 때마침 생긴 일본 아이돌 그룹의 공백을 채우는 역할도 하고 있다. 올해 일본 음악 시장엔 큰 파장이 일었다. 일본 최대 기획사 자니스의 설립자이자 전 대표인 자니 기타가와가 소속 아이돌 멤버들을 대상으로 오랜 시간 성착취를 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로 인해 61년 만에 자니스의 간판이 바뀌는가 하면, 소속 아티스트들도 불가피하게 공백기를 갖게 됐다. 그사이 K팝 아이돌 그룹이 주요 방송과 무대 등을 채우며, 더욱 많은 관심을 받게 됐다.
과거 한국에서 일본 드라마를 자주 리메이크했던 것처럼, 최근엔 반대로 일본에서 한국 콘텐츠를 리메이크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일본에서 영화 ‘기생충’은 연극으로, 드라마 ‘빈센조’는 뮤지컬로 재탄생했다. 두 작품 모두 잇달아 매진 행렬을 벌였다. 드라마 ‘하이에나’, 영화 ‘끝까지 간다’도 리메이크되어 일본 팬들을 만났다. 이 작품들의 인기에 힘입어 앞으로도 다수의 한국 콘텐츠가 일본에서 리메이크될 예정이다.
한국에서도 일본에 대한 관심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볼거리와 음식 등을 즐기기 위해 일본 각 도시를 찾는 수요는 앞으로도 지속될 전망이다. 접근성, 엔저 현상의 영향도 있지만, 이를 뛰어넘어 도시 자체가 하나의 문화 콘텐츠로서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또한 상대적으로 취약한 애니메이션 부문에선 일본 작품을 찾는 경향이 더욱 두드러질 것으로 보인다. OTT를 통해 일본 애니메이션이 대거 공급되고 있는 만큼 이런 현상은 심화될 전망이다.
가깝고도 먼 나라였던 한국과 일본. 하지만 이 같은 문화적 현상들로 인해 이전보다 심리적으로 한층 더 가까워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아시아 문화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양국의 경쟁은 앞으로도 치열하게 이뤄질 전망이다. 그러나 한동안 단절됐던 문화적 교류도 동시에 활발히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세대, 새로운 시대의 플랫폼을 통해 흐르는 문화엔 어떤 장벽도 없으니까.
김희경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pressi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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