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유럽의 흑사병과 21세기 한국의 인구문제

한겨레 2023. 12. 26.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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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세상읽기]
통계청이 14일 발표한 ‘2022~2072년 장래 인구 추계’를 보면, 국내 전체 인구수는 지난해 5167만명, 올해 5171만명을 기록하고 2072년 3622만명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됐다. 흑사병이 창궐한 중세 유럽과 비교되고 ‘집단 자살 사회’라는 수식어까지 붙은 초저출산·초고령 대한민국의 미래상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이철희│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국가미래전략원 인구클러스터장

한국의 인구문제는 급기야 14세기 유럽의 흑사병까지 소환하고 있다. ‘한국은 사라지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뉴욕타임스 칼럼은 현재와 같은 저출산이 지속되면 한국은 흑사병이 창궐했던 14세기 유럽이 겪었던 수준의 재앙적인 인구감소를 피할 수 없고, 이로 말미암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임파선종(bubonic fever)으로 추정되는 흑사병은 1347년 이탈리아에 처음 유입된 뒤 전 유럽으로 빠르게 퍼지면서 수많은 사망자를 낸 역사상 최악의 역병이다. 영국의 인두세 기록은 흑사병 유행 후 30년 만에 잉글랜드 인구가 약 3분의 2로 감소했음을 보여준다. 2023년 통계청 추계에 따르면 향후 50년 동안 한국의 인구는 약 30% 줄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므로 인구감소의 속도와 규모 면에서 21세기 한국은 흑사병 이후의 유럽과 비견될 만하다.

그러나 21세기 한국이 직면한 인구문제의 본질은 14세기 유럽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흑사병 시대에 각인된 극심한 혼란과 공포의 이미지도, 역병이 사라진 뒤 서유럽의 인구와 사회가 빠르게 회복했다는 낙관적인 사실도, 한국이 경험하고 있는 인구 변화의 미래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한국은 14세기 유럽과 어떤 면에서 다른가? 한국의 인구 위기는 중세 흑사병의 충격보다 심각한가?

14세기 흑사병의 참상을 그린 16세기 벨기에 화가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 ‘죽음의 승리’. 위키미디어 코먼스

나쁜 소식부터 시작하자. 21세기 한국은 인구 규모가 줄어들 뿐만 아니라 인구 구조가 급격하게 변하면서 사회경제적·제도적 불균형이 확대될 것이다. 모든 연령층의 사망이 늘었던 흑사병 시대의 유럽과 달리, 한국은 가파른 출생아 수 감소로 인해 인구가 빠르게 고령화되고 있다. 또한 사회보험, 복지제도, 의료시스템, 교육기관 등 중세 유럽에는 없었던 제도들이 형성되면서 인구 변화의 영향도 달라졌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21세기 한국의 인구 변화는 14세기 유럽의 인구감소보다 더 복잡하고 대응하기 어려운 도전이 될 가능성이 크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자. 한 국가의 각종 제도는 대체로 매년 태어나는 인구(출생 코호트)의 규모를 고려하여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예컨대 산부인과와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수, 보육시설과 학교의 교사 수, 군대의 징집 인원과 총병력 규모, 특정한 연령층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서비스의 공급량 등은 나이에 따른 인구수와 어느 정도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출생 코호트의 규모가 급격하게 변하면, 한 사회의 근간이 되는 다양한 제도에 균열이 생기게 된다. 지난해 태어난 출생아 수가 10년 전의 절반, 30년 전의 3분의 1에 불과할 정도로 한국의 출생 코호트 규모는 빠르게 줄고 있다. 소아청소년과가 폐원하고, 대학은 입학 정원을 채우지 못하고, 군은 병력자원 부족에 직면하는 등, 총인구가 본격적으로 감소하기 전에 이미 사회경제적 불균형의 징후가 뚜렷한 것은 인구 구조 변화의 영향을 반영한다.

그렇다고 오늘날 한국의 상황이 더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기술, 시장, 제도 변화에 힘입어 21세기의 세계는 700년 전에 비해 인구 변화의 충격에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이 늘었다. 노동력 확대 여력이 없었던 14세기 유럽과 달리, 현재의 한국에서는 여성과 고령자의 경제활동참가율을 높이고 외국 인력 유입을 늘림으로써 노동인구 감소를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다. 교육·훈련의 개선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고, 자동화나 인공지능을 도입하여 부족한 인력을 대체하는 방안도 중세 유럽인에게 없었던 새로운 선택지이다.

더 근본적인 차이도 있다. 14세기 유럽의 인구감소는 외부에서 유입된 강력한 역병으로 말미암아 사망자가 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던 반면, 21세기 한국의 인구감소는 결혼과 출산의 비용은 늘고 편익을 줄어든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응한 개인들의 선택을 반영한다. 이러한 차이가 좋은 소식인지 혹은 나쁜 소식인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14세기 유럽인들은 “신의 징벌”처럼 다가온 재앙이 지나가기를 무력하게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지만, 21세기 한국에는 사람들의 선택을 바꾸기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고, 그 결과 현재의 암울한 장래 인구 전망이 훗날 예측 오류로 판명될 가능성도 있다. 죽음의 공포를 견디며 재앙이 지나기를 기다리는 일과 인구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일 가운데 어떤 쪽이 더 쉬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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