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정리할 여유 없었는데”…치매 환자 집 정리 현장 가보니
영하 15도 강추위에도 박희종(73)씨는 집 대문을 활짝 열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4명의 정리수납 전문가들이 박씨와 함께 커다란 침대부터 여행가방, 그릇, 옷가지 등을 집 밖으로 쉴 새 없이 날랐다. 2년 전 박씨의 아내(69)는 치매 진단을 받았다. 증상이 심해지자 박씨는 올해 초 하던 일을 그만두고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딴 뒤 집에서 아내를 수발하며 살림을 시작했다. 하지만 집 정리가 안 돼 필요한 물건을 찾기도 어려웠다.
“이 자리에서 집을 짓고 허물고 하면서 5대째 살고 있어요. 지금 집도 지은 지 38년 됐는데, 아내가 치매 진단을 받은 뒤엔 이 사람을 챙기느라 정리는 엄두도 안 나서 차라리 이대로 집을 팔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지난 22일 서울 광진구 능동 집에서 만난 박씨는 ‘치매 환자 집 정리 프로젝트’가 간절했던 이유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광진구는 지난 10월부터 전국 최초로 치매 환자 가정의 집 환경 정리를 지원하는 ‘눈부신 정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치매 환자는 쓰던 물건을 스스로 찾기 어려워 같은 물건을 반복해서 구매하거나 물건을 여기저기 늘어놓는 습관이 있다. 집이 정리가 안 되니 낙상 사고도 일어난다. 보호자와 함께 살아도 물건이 쌓이는 건 마찬가지다. 치매 환자를 돌보느라 집 안 환경을 살필 여유가 부족하고,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집은 보호자의 정신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눈부신 정리’는 이런 가정을 돕고자 시작됐다.
치매 환자인 어머니(85)를 돌보는 이화진(가명·54)씨에겐 부엌과 베란다가 골칫덩이였다. “베란다를 볼 때마다 한숨만 쉬었어요. 5월에 아버지 돌아가실 때 한번 치웠는데, 그 뒤로도 무섭게 물건들이 쌓였습니다.”
이씨는 거실과 주로 생활하는 방 등은 틈날 때마다 정리하지만, 오래된 식기가 쌓인 부엌과 창고가 된 베란다는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난 14일 광진구 구의동 이씨의 집 베란다에선 지름이 1m 정도 되는 커다란 바구니부터 언제 만들었는지 모를 장류, 신발 상자, 낡은 장화, 먼지 쌓인 종이가방, 오래된 바둑돌 등이 쏟아져 나왔다.
치매 환자의 집 정리는 일반 가정과는 다른 기준으로 진행된다. 일반 가정의 정리가 집 전체를 깔끔하게 치우는 ‘청소’에 가깝다면 치매 환자의 가정은 이화진씨의 집처럼 ‘부분 정리’에 초점을 맞춘다. 집 전체가 갑작스레 달라지면 치매 환자가 인지에 혼선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수납은 기존 수납장을 최대한 활용하고, 치매 환자가 특정 영역에서 많이 찾는 물건은 그 자리에 둔다. ‘눈부신 정리’ 프로젝트를 맡은 정리수납 컨설팅업체 ‘새론’의 이옥주 대표는 “치매 환자가 사용하기 편하게, 자주 쓰는 물건을 가까이 둘 수 있도록 정리한다. 보호자들은 정리를 하고 싶어도 시간이 없고, 쓰는 물건과 버릴 물건이 뒤섞여 있어 정리하기 어려워한다”고 말했다.
광진구는 이달까지 석달 동안 홀로 사는 치매 환자 7명과 보호자와 함께 사는 치매 환자 등 38명의 집을 정리했다. 정리 도중 오래전 돌아가신 어머니 사진을 발견한 치매 환자, ‘도둑맞았다’던 165만원을 찾게 된 치매 환자, ‘이런 서비스는 처음 받아본다’는 보호자 등에게 깨끗해진 집을 선물했다.
그 결과, 지난 7일 서울시 주관으로 열린 ‘2023년 치매관리사업 경진대회’에서 최우수 기관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박씨와 이씨 모두 “너무 고마운 일이다. 비슷한 처지의 주변 사람들에게 홍보도 많이 했다”며 ‘눈부신 정리’ 프로젝트에 크게 만족했다.
‘눈부신 정리’는 올해 12월이 마지막이다. ‘2023년 보건복지부 공모사업’에 선정돼 한시적으로 진행한 프로젝트기 때문이다. 별도로 예산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내년 사업은 불투명하다. 광진구치매안심센터 관계자는 “집을 수리할 수 없는 경우 정리를 통해서 최소한의 주거 환경을 조성하는 게 치매 환자 가정에 큰 도움이 된다”며 “전국의 치매안심센터에서 매년 치매 환자 집 10여곳 정도라도 이런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환자 가족의 삶의 질과 만족도가 올라갈 것이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손지민 기자 sj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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