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낙연 "민주당 가치 회복 외치는 마지막 사람이고 싶다"
5선 의원, 전남 지사, 국무총리까지 지낸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민주당) 대표가 구사한 말은 그대로 글로 옮겨도 될 만큼 신중했다. 말의 내용은 깊고 넓었다. 우리 정치 현실을 비판할 땐 여야 불문치 않았고 해결책을 모색할 땐 우리 역사뿐 아니라 세계 정치사도 넘나들었다. 최근 신당 창당 시사 발언을 두고 정치권 관심이 그에게 집중됐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권유로 정계 입문, 민주당 적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지는 그가 신당까지 언급하게 된 배경에 대해 지난 22일 서울 종로구 머니투데이 사옥에서 직접 들어봤다. 이 전 대표는 현재 대한민국에 대해 "침몰하느냐, 회복하느냐 기로에 선 매우 위태로운 상태"라며 "민주당의 정통성과 정의로운 가치 회복을 외치는 마지막 사람이 되겠다"고 강조했다.
▶영화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의 두 번째 대권 도전 직전까지가 소개됐다. 숱한 고난을 겪고 그것을 이겨내신 거인의 위대한 생애를 보여준 영화다. 엄숙한 마음에 사로잡혔다. 본인으로서는 고난과 영광의 생애였겠지만 그 분 존재 자체가 대한민국과 국민께는 축복이었다 생각한다.
-영화를 보시고 최근 현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셨을 듯하다. 현재 정치현실과 현정부 평가는 어떤가
▶준비된 지도자를 갖는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통감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아마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다양하고 깊게 준비하신 대통령일 것이다. 재임 중 업적이 찬란했고 지금은 김 대통령에 비교해선 안 될 정도로 준비와 경험이 부족한 대통령이 국정을 맡아 매우 혼미한 상황이다. 저는 지금의 대한민국을 암흑기라 부르고 있다. 모든 분야가 길 잃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대로가면 이 정부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최악의 정부로 기록될 것이다. 경제, 정치, 외교·안보 어느 것 하나 불안하지 않은 게 없다. 그런데도 야당이 대안으로서의 믿음을 국민들로부터 받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야당은 도덕성 시비, 끊이지 않는 사법적 문제 등으로 방탄이 가장 중요한 일처럼 돼버려 국민들로부터 혼미한 정권의 대안으로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
▶경제 분야를 보면 대부분 가정이 반찬 수를 줄여야 할 정도로 생활물가가 폭등했는데 아무 대책이 나오지 않고 있다. 경제성장률뿐 아니라 잠재성장률마저 1%대로 추락했다. 이대로 가면 현 정부 임기 중 성장률이 0%대로 갈지도 모른다. 미래 준비도 없다. 대한민국 전체가 추락하고 있는 상태다. 국제 기관들은 언론자유를 포함한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평가하고 있지 않나. 외교·안보에서는 한미일 관계만 개선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처럼 착각한 나머지 3국 관계에 치중했는데 그러다 보니 한중 관계가 악화돼 우리 경제에 타격을 줬고 남북관계가 악화돼 한반도 긴장이 고조됐다. 그런데도 정부는 북한과의 대화 시도를 전혀 못 하고 있고 계속 적대적 언동을 하고 있다.
▶정권이나 야당이나 자기 진영을 향해 힘자랑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국회에서 주요 법안을 일방 처리하는데 절차적으론 합법이다. 대통령 거부권 행사도 절차적으론 합법이다. 합법을 가장한 힘자랑이 반복되니 국민 입장에서는 얻는 게 없다. 세상에 아무 변화도 생기지 않는다. 진영만 볼 게 아니라 국민 전체를 보고 어렵더라도 끝까지 대화를 해서 국민들께 뭔가를 안겨드려야 하지 않겠나.
-누가 나서서 악순환을 끊을 수 있을까
▶대통령이 가장 큰 책임을 갖고 있다. 여야를 향해 좀 더 대화해 달라 요청을 하는 게 옳다.
-최근 우리나라,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에서 극단적 성향의 정치인들이 집권하거나 주류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위축과 좌절(탓)이라고 할까. 경제가 위축되고 삶에서 좌절을 경험하다 보면 울분 같은 게 쌓인다. 그런 배경에서는 증오와 분열을 일으키는 포퓰리스트(populist·대중 인기에 영합해 일을 추진하려는 사람) 정치인이 시선을 끈다. 미국은 과거 영화롭던 시대가 끝나고 국민 간 분열이 심해진 상태다. 뭐가 잘 안되니 스트롱맨형 정치인에게 시선이 간다. 유럽은 난민 유입 때문에 기존 사회질서 등이 헝클어져 있다. 새 대처가 필요한데 반발도 생기다보니 혼란스러운 상태다. 이런 경제·사회적 변화가 포퓰리즘 정치를 일으키는 한 요인이 될 것이다.
미디어도 빠트릴 수 없다. 불과 30~40년 전까지만 해도 몇 개 언론 매체 중 하나만 보면 대체로 균형잡힌 정보를 습득할 수 있었다. 지금은 미디어가 너무 많아 선택할 수 없다. 입맛에 맞는 것만 선택하게 되고 알고리즘이 그렇게 만들기도 한다. 정보 편식 탓에 국민들도 양극화되고 언론은 그걸 더 부추기면서 영업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미국에 '분노하라. 그러면 (신문) 1면에 나온다'는 말이 있다. 우리도 점잖게 말하는 것보다 막말을 해야 더 뉴스에 많이 나오지 않나.
-이런 현상에 대해 해결책이 있을까
▶지금은 민주주의 위기다. 민주주의가 성숙도 되기 전 왜곡돼 버렸다. 포퓰리즘 , 극단 정치는 위기 양상이다. 해결책으로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우선 당내 민주주의, 진영 내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이것이 활발하면 소수 의견에서도 합리적 대안이 나온다. 두 번째는 다당제다. 미국은 양당제 오랜 전통 때문에 양극화한 상태로 가면서 그것이 심화되고 있다. 심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증오의 양극화로 가고 있다는 게 문제다. 예전에는 '나는 공화당이 좋으니 지지한다', '나는 민주당이 좋으니 지지한다'고 했다. 사랑의 경쟁이었다. 지금은 '나는 공화당이 싫으니 민주당을 지지한다'는 식이다. 국민들 사이에 적개심이 생겨나고 심리적 내전 상태로 간다. 지금 대한민국은 그 지점에 와 있다. 그런 상태를 해소·완화하는 두 번째 대안이 다당제다.
▶지금보다는 중도적이겠다. 극단의 투쟁 일변도 정치를 완화하려면 좀 더 중도적인, 책임있는 세력이 등장할 필요가 있다. 제가 아니더라도 대한민국을 위해 그렇다.
-우리나라는 대통령제를 따른다. 제3당이 중도 역할을 하더라도 대통령은 거대 정당에서 나오는 경향이 있다. 이런 환경에서 중도 정당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예를 들면 '1노 3김'(노태우·김대중·김영삼·김종필) 시대에 국회가 4당까지 갔었다. 당시 김재순 국회의장은 (이 구도에 대해) 황금분할이라 했다. 어느 쪽도 일방독주를 하지 못하는, 타협해야만 되는 상황이다. 올해 미국 연수를 마치고 오는 길, 독일에 머물며 대한민국 상황을 보면서 어떻게 이 문제를 돌파해야 할까 하는 문제에 골몰했다. 우리는 연정 경험도 부족하고 정계의 대대적 개편도 어렵다. 그나마 실현 가능한 것은 총선을 통해 더 책임있고 합리적인 세력이 생기는 것이 국가를 위해 낫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독일 사민당 소속 빌리 브란트 전 총리의 동방정책을 기민당의 헬무트 콜 전 총리가 계승했다. 이것을 보고 '멋있다'고 하는데 브란트와 콜, 두 정부 외무장관이 같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당시 외무장관이 자유민주당의 한스-디트리히 겐셔다. 동일인이 외무장관을 하니 정책 계승이 더 쉬웠다. 연정 전통 때문에 가능했다. 우리가 (이런 전통을) 갑자기 도입할 순 없겠지만 최소한 그것이 한국 정치의 안전장치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지금처럼 가다간 폭발할지도 모르는데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제3 세력의 등장이다.
-현안 질문도 하겠다. 지난 6월 귀국시에 "못다 한 책임을 다 하겠다"고 했다. 그게 신당 창당을 의미했나?
▶그 때는 아니었다. 당시 '못다 한 책임을 다하겠다'는 말에 앞서 '대한민국이 여기저기가 무너지고 있다'고 했다. 대한민국이 추락하고 있다는 걸 느꼈고 추락이냐, 회복이냐의 마지막 기로가 지금이라 봤다. 제게 남은 힘이 손톱만큼이라도 있다면 대한민국이 침몰로 가지 않게 하는데 남은 힘을 바쳐야겠다, 그런 뜻이었다. 지금도 그 고민은 계속된다.
-최근 한 방송에 나와 신당 창당을 언급하셔서 민주당 내 파장이 컸다. 이런 반응 예상하셨나, 창당 결심의 결정적 계기가 있었나
▶실무적으로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단 뜻이었다. '새해 초 국민께 말씀드리겠다, 연말까지는 민주당에 시간을 드리겠다'는 뜻이었다. 민주당 내 여러 반응들이 나왔던 것은 그분들이 그만큼 저를 안 만났기 때문이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떤 문제에 부딪치면 그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을 해야지 자신들끼리 규정짓고 모욕하고 조롱하고 배제하는 일이 먼저 돼선 안 된다.
▶지금은 그것을 먼저 할 단계는 아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이준석 전 대표와 (이 문제로) 만나셨거나 연락을 하셨거나 만나실 계획이 있나
▶만난 일도, 연락도, 만날 계획도 아직까지 없다. 지금은 그 단계가 아니라 생각한다.
-민주당의 가장 큰 문제점은
▶도덕성 마비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통계에 따르면 현역 국회의원의 33.2%에 해당하는 94명이 전과자라는 게 아닌가. 민주당 의원이 68명, 국민의힘 소속이 22명이다. 의석수 비중을 고려해도 민주당 숫자가 훨씬 더 많다. 그래서인지, 또 다른 이유에선서인지 웬만한 죄는 죄도 아니라 생각하고 지나가는 게 습관처럼 돼 있다. 그러니 국민들이 질리고 국민들 사이에서도 죄의식에 둔하게 반응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때로 사법절차를 조롱, 방해하기도 한다. (의원들이) 불체포 특권을 남용하기도 한다. 사회의 죄의식 둔화, 사법질서에 대한 왜곡 현상은 국가적 위기다. 이대로 둬선 안 된다. 수권정당이 그러면 안 된다. 검찰권 남용의 측면도 분명 있지만 모든 것이 다 탄압은 아니지 않나.
-민주당에 통합비상대책위원회(통합비대위)가 들어서면 창당 계획을 접을 수도 있나
▶통합비대위 아이디어의 충정에 공감한다고 이미 (다른 인터뷰에서) 밝혔다. 통합비대위 체제로 나아간다면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대화할 용의가 있단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새해가 되면 사법 리스크가 더 커질 것 같은데 그 상태로 선거를 치러도 좋다고 생각하나. 선거라는 것은 평소보다 더 좋은 상태로 (정당을) 만들어 국민 앞에 내놓는 것이다. 그런데 돈봉투에 연루됐단 의혹을 받는 의원들이 차례로 소환 조사를 받고 당 대표는 일주일에 며칠씩 재판 받으러 다니는 상태로 선거해도 좋을까. 민주당을 위해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다.
▶내년은 각국에서 선거가 이뤄지는 선거의 해다. 불확실성이 고조될 것이기에 그 불확실성에 기민하고 유효하게 대응 태세를 갖춰야 한다. 미국 대선에서 현재로서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이 유력해 보이는데 그 경우 한반도 정책을 포함, 대외 정책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은 없으리라 보지만 대만해협을 둘싸고 유동성이 커질 것이다.
미 공식 자료에 따르면 대만해협 위기 촉발 가능성이 높은 해가 2027년이다. 해당 연도에 (인민해방군창설 100주년 등) 중국의 여러 이벤트가 있다. 2024년 말~2025년 초가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미국이 대만에 대해 22종의 무기체계를 제공했는데 그 실전 배치가 완료되는 게 2025년이다. 또 2024년 12월 미국 대선 후 2025년 1월에 대통령 취임식을 갖는다면 그 사이 시기가 미 권력 공백기여서 위험할 수 있단 이야기다. 대만해협 불안정은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치게 돼 있다. 미국 의회조사국(CRS)은 이미 대만해협에 무력 충돌이 생기면 주한 미군 일부 이동 배치를 검토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 경우 우리가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끝으로 독자들에게 하시고픈 말이 있다면
▶지금은 대한민국이 침몰할 것이냐, 회복할 것이냐의 마지막 기로다. 그런 중차대한 기로에 서 있는데도 정치는 길을 잃고 있다. 그렇게 길을 잃은 정치를 이대로 둬선 안 된다. 국가를 위해서 대담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제가 가진 힘은 별로 없지만 역사 앞에 비굴하지 않겠다. 대한민국의 위기 앞에 몸 사리지 않겠다. 민주당의 정통성과 정의로운 가치의 회복을 외치는 마지막 사람이고 싶다. 저 이외에는 다시는 누구도 그렇게 외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상태가 되길 바란다.
대담=이상배 정치부장 ppark140@gmail.com 정리=김성은 기자 gttsw@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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