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화폐(CBDC) 개발 서두르는 한은… “스테이블코인, 통화주권 위협”

최온정 기자 2023. 12. 2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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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 내년 중 기관용 CBDC 활용성 테스트 진행
비트코인 제친 스테이블코인… 페이팔까지 진출
CBDC 개발경쟁도 치열… “원화 위상 유지해야”

한국은행이 CBDC(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화폐)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스테이블코인(가치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가상화폐)의 거래량이 늘어나면서 법정화폐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어서다. 각국의 CBDC 발행 경쟁도 치열해지면서 원화의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디지털 화폐를 개발할 필요성이 커졌다.

26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한은은 지난 18일 LGCNS와 96억8000만원 규모의 계약을 체결하고 CBDC 활용성 테스트에 필요한 시스템을 개발하기로 했다. 이번 테스트는 기관용 CBDC를 비롯해 예금 토큰과 이머니 토큰 등 CBDC를 기반으로 하는 다양한 지급수단까지 대상으로 하며, 내년 중 본격 실시할 예정이다. 일부 실험은 일반 국민도 참여할 수 있게 하는 등 대규모로 진행된다.

◇ 페이팔까지 뛰어든 스테이블코인… “법정화폐 구축 우려”

한은은 지난 2021년부터 2년간 범용 CBDC 관련 모의실험을 실시했지만, 민간 기업과 계약을 맺어 기관용 CBDC의 활용성 검증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CBDC는 활용 범위와 사용 주체에 따라 범용과 기관용으로 나뉜다. 범용은 현금처럼 가계와 기업 등 경제주체들이 사용할 수 있고, 기관용은 지급준비금과 유사하게 금융기관 간 자금거래에만 사용된다.

지난달 12일 서울 서초구 빗썸 고객지원센터 전광판에 비트코인 실시간 거래 가격이 표시되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한은이 CBDC 개발에 속도를 내는 것은 스테이블코인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스테이블코인은 가치가 실제 자산에 고정돼 변동성이 없는 암호화폐 자산이다. 미국 달러와 동일한 가치를 보유하도록 설계된 ‘테더(USDT)’가 대표적이다. 테더는 비트코인 등 다른 가상자산에 비해 변동성이 적어 출시 5년 만인 지난 2019년 비트코인을 제치고 거래량 1위를 차지했다.

지난 8월에는 페이팔까지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면서 시장이 더욱 커지고 있다. 페이팔은 202개국에 약 4억3000만명의 사용자(8월 기준)을 보유한 핀테크 업체로, 글로벌 지급·송금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페이팔 진출을 계기로 은행과 신용카드사 등 전통적인 지급결제시장 참가자도 가상자산과 결합한 서비스를 도입할 유인이 커졌다.

이는 한은에겐 달갑지 않은 소식이다. 스테이블코인이 널리 사용되면 화폐의 단일성이 보장되지 않을 수 있고, 법정화폐에 대한 수요가 줄어 화폐의 주조차익과 통화정책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아울러 스테이블코인이 가치를 유지하지 못하면 급격한 자금유출로 이어져 제2의 테라·루나사태처럼 금융시장의 안정을 위협하는 사건이 발생할 위험도 있다.

이창용 한은 총재도 지난 15일 서울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2023 MOEF-BOK-FSC-IMF 국제컨퍼런스’에서 이런 점을 지적했다. 그는 “규제를 받지 않은 스테이블코인은 이름과는 달리 가치 측면에서 불안정하다”면서 “중앙은행의 화폐 등을 구축할 경우 금융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움직일지 의문”이라고 했다. 그는 “기관용 CBDC 기반의 예금 토큰 등은 이에 대한 대안 또는 대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치열해지는 CBDC 경쟁… 중국·인도 이어 미국까지 가세

각국의 중앙은행이 CBDC 관련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도 원인이다. 지난 7월 국제결제은행(BIS)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 세계 중앙은행 86곳 중 93%가 CBDC 관련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전체 조사대상 중 75% 이상이 소액·거액결제용 CBDC 모두를 대상으로 연구 중이다. 일부는 향후 1~2년내 출시가 예상된다. 스웨덴과 호주, 말레이시아 등 각국의 중앙은행은 구체적인 CBDC 모의실험 결과까지 보고서로 발표하고 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 15일 오전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2023 MOEF-BOK-FSC-IMF' 국제컨퍼런스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뉴스1 제공

기축통화국 자리를 엿보는 신흥국들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중국인민은행은 지난 2019년부터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디지털 위안화’ 시범 사용을 진행했으며, 현재까지 총 1조8000억 위안이 거래됐다. 인도 중앙은행은 지난 6월 18개국 중앙은행과 디지털 루피화 CBDC 활용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CBDC 발행에 미온적이던 미국도 디지털 달러화 개발에 나섰다. 달러의 패권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작년 3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디지털 달러화 연구개발에 박차를 가하라는 행정명령을 발표했고, 8개월 뒤인 11월에는 뉴욕 연방준비은행이 CBDC의 원형을 시험하기 시작했다.

한은도 가만히 손놓고 있기가 어려운 상황이 됐다. 각국의 CBDC 경쟁에서 밀리면 원화의 입지도 위태로울 수 있다. 한 한은 관계자는 “현재는 달러 등 기축통화를 중심으로 거래가 이뤄지지만, 가상화폐 시장에서는 주도권이 다른 나라로 넘어갈 수도 있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원화의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CBDC 발행이 필요하다”고 했다.

현재 한은은 CBDC 활용성 테스트를 비롯해 BIS 싱가포르 혁신 허브와 함께 국가간 지급결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이 총재는 최근 이와 관련해 “경제의 디지털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면서 “미래는 빠르게 변화하고 중앙은행도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보다는 민간과 같이 경쟁하면서 기술적·제도적으로 새로운 디지털 환경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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