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無知지옥] 10대 개미는 느는데 주식 교육은 제도권 밖
개편된 2025년 교육과정에서 금융 과목은 고등학교가 유일
곗돈과 은행 적금이 전부였던 시절도 있었으나 지금은 스마트폰을 활용한 주식, 가상화폐 매매 등 투자처가 다양해졌다. 그만큼 금융 소비자들의 인식도 바뀌어야 하지만,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정신이 바뀌지 않았다. 돈을 다루는 장사를 가장 천한 직업으로 여기는 탓에 그간 우리 사회에서 돈에 대한 얘기는 금기시됐고 금융 교육이 전무했다. 그 결과 3대 사모펀드(라임·옵티머스·디스커버리) 및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불완전판매 논란, 라덕연 사태가 터졌다. 반복되는 금융 사고를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짚어봤다. [편집자주]
#이소연(17)양은 증권사 모바일 트레이딩 시스템(MTS)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했는데, 요즘 겨우 웃기 시작했다. 올해 추석 때 친척 어른들께 받은 용돈 50만원 전부를 삼성전자에 베팅했는데, 6만9000원에 산 삼성전자 주가가 한동안 주춤하다가 최근 들어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소연양은 “(삼성전자 주식을) 매수하고 나서 석 달째 7만원 초반대에 갇혀있었는데, 이제 좀 괜찮아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소연양의 포트폴리오에서 ‘빨간불’은 삼성전자뿐이다. 다른 종목의 수익률은 마이너스(-) 7~20%를 기록 중이다. 소연양은 “기업을 직접 분석하고 투자하고 싶은데 용어 자체가 너무 어렵다”며 “공부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최동우(13)군은 세뱃돈으로 주식을 시작했다가 현대차로 한 달 치 용돈인 4만원을 번 후 주식에 흥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초마다 움직이는 숫자에 눈이 아프지만 주식 유튜브를 보며 공부 중이다. ‘저평가’, ‘밸류에이션’ 등 어려운 단어는 부모님께 물어보며 나름대로 방과 후 수업도 하지만 따라가기엔 힘에 부친다.
최 군은 “투자 수익금으로 친한 친구들에게 탕후루를 사줬는데 친구들이 주식을 신기해했다”며 “학교에서 투자가 어떤 것이고 주식 등 다양한 종류가 있으며, 어떻게 투자하는지 수업을 해주면 열심히 들을 것 같다”고 열의를 드러냈다.
주식을 하면 패가망신하는 줄 알았던 사회 분위기는 2020년 ‘동학 개미 운동’이 불면서 반전됐다. 이제는 주식을 안 하면 쉽사리 대화에 낄 수 없게 됐다. 주식 열풍은 10대도 피하지 못했다. 동우군처럼 최근 주식 투자에 관심을 갖는 청소년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국내 공교육은 10대의 금융 갈증을 해소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올해 9월 발표된 하나금융연구소의 ‘잘파 세대(Z세대와 알파 세대의 합성어)의 부상’ 보고서에 따르면, 중·고등학생 5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 중 26%는 주식 투자를 ‘향후 관심 있는 금융 상품’으로 꼽았다. 모든 금융 상품 중 1위였다.
주식 투자는 초등학생 100명 대상 설문 조사에서도 5위(8%)에 올랐다. 또 같은 보고서에서 잘파 세대의 94%가 금융 거래 시 어려움을 겪었다고 고백했는데 ‘나이로 인한 거래 제한’을 제외하면 ‘금융 교육 및 지식 미흡’이 가장 큰 걸림돌로 꼽혔다.
청소년의 고민이 무색하게도 정부와 업계는 이들에게 투자를 권장하고 있다. 금융당국은 청소년이 자유롭게 주식에 투자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줬다. 올해 4월 금융위원회는 미성년자도 스마트폰 앱으로 주식 계좌를 개설할 수 있도록 ‘비대면 실명 확인 가이드라인’을 개편했다. 기존에는 미성년자가 주식 계좌를 만들려면 부모와 함께 증권사 영업점에 방문해야 했는데, 이런 불편을 해소한 것이다.
업계 역시 미래 손님인 잘파 세대를 사로잡기 위해 관련 상품과 서비스를 갖추고 있다. 삼성증권은 10대들이 많이 쓰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틱톡 채널 ‘팝톡’을 개설해 구독자에게 투자 정보를 제공 중이다. 돈을 주는 증권사도 있다. 미래에셋증권은 올해 말까지 미성년자 신규 고객에게 2만원의 투자금을 지원한다.
하지만 10대들에게 투자를 권장하는 것 이상으로 교육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교실 안 10대는 여전히 국어·영어·수학만 훈련받고 있다. 그간 금융 교육에 진전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금융감독원과 함께 2010년 ‘초·중·고 금융교육 표준안’을 제정했다. 10년 뒤인 2020년엔 새로운 투자 환경에 맞춰 개정하기도 했다. 금감원은 각 초등학교에 ‘슬기로운 생활 금융’, 중·고등학교엔 ‘생활 금융’ 교재를 만들어 배포했다.
문제는 실제 수업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여러 전문가가 붙어 만든 교재지만, 1년 내내 책꽂이에 잠들어 있는 게 현실이다. 금융 수업이 정규 교과 과정에 포함된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수업을 진행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경기도 초등학교 교사인 이모(27)씨는 “금감원에서 배포한 금융 교재가 있는지 모르는 선생님들이 대부분”이라며 “금융 교육은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을 활용해 하거나, 10월 31일 금융의 날에 담임 선생님이 계기 교육식으로 잠깐이라도 하는 게 최선”이라고 말했다. 정규 교육 과정을 진행하기도 벅찬 데 금융 교육까지 별도로 진행하는 건 무리라는 뜻이다.
현재 국내 교육 과정 중 금융 교육은 상대적으로 다른 교육에 비해 부족한 편이다. 고등학교 ‘경제’ 과목에 ‘경제생활과 금융’ 부문이 들어가 있지만 과목 자체가 찬밥 신세다. 2024학년도 수능에서 ‘경제’를 선택한 학생은 4888명으로 전체 응시자 44만4870명 중 1%에 불과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선 사회나 기술·가정 과목에서 소비 생활, 자산관리 등 일부 내용을 배우는 데 그친다.
2025년부터 고교 학점제가 도입되면서 고교 교과 과정에 사회 과목 중 하나로 ‘금융과 경제생활’ 과목이 신설됐다. 이 과목은 ▲행복하고 안전한 금융 생활 ▲수입과 지출 ▲저축과 투자 ▲신용과 위험 관리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기본적인 금융 투자 상품 정보와 투자자 보호 제도 등이 주요 골자다. 일각에선 이 과목이 수능과는 무관해 청소년들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공교육과 별개로 금감원과 한국거래소 등 기관에서 금융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증권사와 은행, 보험사에서도 금융 수업을 열고 있기는 하다. 관심이 있는 10대가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이다. 한국거래소는 온라인으로 자본시장 교육을 제공 중이다. 어린이, 청소년, 초보 투자자로 나눠 주식과 채권에 대한 개념부터 증권투자 방식까지 교육을 진행한다. 올해 7월 특성화고 학생을 대상으로 ‘KRX 찾아가는 금융교육’, 경제경영이해력 인증시험 금융교육’ 등 현장 강의를 열기도 했다. KB국민은행은 ‘KB스타 경제 교실’을 운영해 초·중·고등학생에게 투자, 자산관리 등 전반적인 금융 지식을 제공한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이 체계적인 금융 교육 없이 투자에 나서게 되면 ‘묻지마 투자’ 등 위험 투자를 할 수 있어 큰 손실을 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상호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금융 교육을 통해 주식투자가 도박 같은 투기적 놀이가 아니라, 건전한 자산 증식의 수단이라는 점을 인식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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