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걷기여행의 시작점, 미야기 올레 무라타 코스
길에 이름이 붙고 사람들이 찾아와 걷기 시작할 때, 100가지의 다른 여행이 생겨난다. 또 하나의 길 위에 새로운 여행이 열렸다. 무라타 코스, 미야기 올레의 다섯 번째 길이다.
●치유와 귀환을 바라며
미야기현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가장 큰 피해를 봤던 지역 중 하나다. 강도 7의 강진과 높이 10m의 쓰나미로 1만명이 넘는 사상자가 생겼고 그로 인한 재산 손실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로부터 수년 후. 복구에 땀과 노력을 쏟아부은 결과, 자연과 주민들의 삶은 제 모습을 찾아갔다. 하지만 아픔은 여전히 남았고 지역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피해지역'이라는 우려가 붙어 있었다.
주민들은 '진정한 치유'와 '여행자들의 귀환'이 결코 다른 의미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미야기현은 우선 걷기 여행자들에 주목했다. 걷기야말로 건강한 여행과 자연으로의 회귀를 상징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제주올레는 이상적인 파트너였다. 2018년 10월, 게센루마·가라쿠 코스와 오쿠마쓰시마 코스가 '미야기 올레'라는 이름을 달고 개장했다. 그리고 이어서 오사키나루코온천 코스와 토메 코스도 열렸다.
바람은 이루어지는 듯했지만, 시련은 다시금 찾아왔다. 코로나 19, 길은 멈췄고 여행은 사라졌다. 하지만 미야기현은 재앙을 이겨냈던 저력이 있었다. 팬데믹의 암울한 시기는 되려 기회가 됐다. 제주올레와 함께 새로운 코스 개발에 전력했고, 2023년 11월 드디어 그 결실을 이뤘다. 미야기 올레 다섯 번째 길, 무라타 코스의 이야기다.
●첫걸음을 붙잡은 미치노에키
올레길은 첫걸음을 떼기가 쉽지 않다. 시작점부터 여행자의 관심을 끄는 스폿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치노에키(道の)는 '길가 정거장'이라는 뜻으로 한국의 도로 휴게소와 같은 개념이다. 일본 전 지역에 1,000여 개나 있다는 이곳의 묘미가 상당하다. 분위기나 구성은 일반 마트와 별반 다를 것이 없지만, 매대에 올라 있는 상품 중 상당 수가 지역에서 생산된 것들로 채소, 과일은 물론 주류까지 포함된다.
무라타 미치노에키는 특산품인 소라콩(そらまめ) 아이스크림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도호쿠(東北) 지방의 홉으로 제조한 한정판 삿포로 캔맥주도 맛볼 수 있다. 도시락과 생수에 맥주까지 판매하고 있는 미치노에키, 올레길에서의 식사가 더욱 즐거워질 전망이다.
무라타 역사미래관도 올레길을 걷기 전, 감을 잡는 데 도움이 되는 시설이다. 입구에는 무라타 출신으로 1960년대 올림픽을 2연패 하고 세계선수권에서 4번이나 정상에 올랐던 역도 영웅 미야케 요시노부(三宅義信)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전시실, 도서실, 연수실로 구성된 내부는 예상만큼 깔끔하다. 휴게실 소파에 앉아 지역에서 발간된 간행물과 여행 정보를 뒤적거려 본다. 전시실도 들어가 봤다. 무라타초에서 발굴된 조몬시대(일본의 신석기 시대)의 토기를 비롯해 역사 관련물이 정갈하게 놓여 있다. 한 바퀴 돌아 나오니 마을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주민들의 생활 문화가 가슴에 슬며시 들어온 느낌이다.
●싫증 날 틈 없는 길
드디어 출발, 선두에 서서 씩씩하게 걸어 볼 요량이었지만 어쨌든 많이 지체됐다. 시작점을 벗어난 코스는 도로로 빠져나오더니 이내 마을 길로 들어선다. 다시 또 걸음이 느슨해졌다. 일본 시골의 정취 때문이다.
미야기 관광명소 100선에 꼽힌다는 다테 가문의 보리사(菩提寺, 조상의 위패를 모신 개인 소유의 절) 연못도 좋지만, 그래도 자꾸만 눈길이 가는 건 소소한 가옥과 울타리를 비집고 나온 꽃들이다. 일본의 어느 곳을 걸어도 있을 법한 풍경이지만, 눈앞에 있으니 더욱 심취된다. '맞아, 이런 게 올레길이지.' 무라타 올레길의 묘미는 걸을 때마다 다른 그림이 펼쳐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지겹거나 싫증 날 틈도 없다.
마을을 벗어나니 나지막한 동산이 나타난다. 그런데 산세의 깊이가 상당하다. 쭉쭉 치솟아 하늘을 가린 삼나무 숲 저만치에 신사가 있다. 시라토리 신사(白鳥神社)다. 이곳의 주요 볼거리는 오주의 사등(州, 동북지방의 옛이름 또는 蛇藤, 뱀 넝쿨 등나무)으로 불리는 수령 800년의 등나무다. 삼나무를 칭칭 감은 모습이 구렁이를 닮았다는데, 3,000년을 살았다는 혹이 난 느티나무에 정신이 팔려 지나치고 말았으니,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 생겼다.
●수수한 자연 위에서
아이야마 공원(相山公園)은 벚꽃 스폿이란다. 빈 가지조차 멋들어진 왕벚나무를 따라 돌다 기어이 화사한 계절을 상상하고 말았다. 이리저리 마음을 뺏기다 자연이 고파질 무렵에 길은 기다렸다는 듯 들과 산으로 진격한다. 절묘한 타이밍이다. 공원에서 간만부동존(干不動尊)까지는 대략 6km, 삼나무 숲 터널을 지나고 작은 개울도 건너는 동안 인위적 시설물 따위는 전혀 볼 수 없었다. 그야말로 수수한 자연 위에 살포시 놓였다.
무라타 올레길은 최고점이 해발 200m가 안 될 정도로 완만하다. 게다가 길이도 13.5km로 적당해 누구나 힘들이지 않고 걸을 수 있다. 초원의 구릉마다 일본의 100대 명산 자오연봉이 등장해 시야와 가슴을 뻥 뚫어 주는가 하면, 이따금 삼나무 톱밥 길이 나타나 걷기의 고단함까지 폭신하게 흡수한다.
●옛 창고의 기발한 변신
무라타 올레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마지막 1km 구간인 창고 거리다. 과거 홍화(잇꽃)는 적색 색소의 주원료였다. 특히 에도시대에는 그 생산량이 극히 적었기 때문에 귀하게 대접받았고 같은 무게에서 금보다 비쌌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무라타는 에도시대 상업 도시로서 번화했다. 무라타 상인은 홍화와 쪽(藍)을 여러 지방에서 사들여 에도와 북부지역으로 운반해 파는 역할을 했다. 때문에 무라타에는 홍화를 저장하고 유통하던 창고와 상점들이 즐비했다. 창고 거리에는 에도 말기부터, 쇼와 초기까지의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무라타 상인 야마쇼 기념관(村田商人やましょう記念館)은 외관에서 내부까지 당시의 건축양식과 생활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국가 중요 문화재다. 맞은편 관광 안내소도 예사롭지 않다. 이 건물의 본이름은 '무라타 야마니저택', 이 또한 1896년생으로 과거에는 창고였단다.
●민낯 같은 길에서 만난 편안함
시작점이자 종점인 미치노에키로 돌아왔다. 식사를 포함해 대략 5시간 정도 걸렸다. 도호쿠 삿포로 맥주 두 캔을 사고 벤치에 앉았다. 걷기를 마친 사람들의 표정에는 역시나 뿌듯함이 있었다. 함께 걸었던 한국인 여행자들은 여느 올레길보다 좋았다고 입을 모았다. 맥주 한 모금을 들이킨 후, 지나온 코스를 돌이켜 봤다.
무라타 올레에는 찬란한 바다 풍경이나 휘몰아치듯 쏟아지는 골짜기의 장엄함은 없었다. 그런데 걷는 내내 잔잔한 바람 같은 감동이 일었다. 삶에 가까운 곳에서 존재하고 있는 동네, 공원, 산, 들, 언덕, 거리 그리고 그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과 자연을 보았다. 민낯 같은 길이 주는 편안함. 그 속에서 걷기가 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또 한 번 깨닫는다.
▶WHAT TO EAT
엄선된 수타 소바의 맛
아무리 완만한 길이라도 걷다 보면 출출할 때가 온다. 식사 또한 여행의 일부니만큼 이왕이면 맛있고 낭만적이기까지 하면 좋겠다. 우바가후토코로 지구()와 민화의 마을 내 식당들은 수타 소바가 주 종목이다. '미야기 수타소바 연구회'의 협력으로 엄선한 수타 소바를 제공한다니 군침이 돈다. 미치노에키에서 준비해 온 도시락도 나름의 즐거움이 있다. 식사 후엔 무라타초 문화재로 지정된 민가를 둘러보고 높이 8m와 3.5m의 거대한 물레방아 앞에서 인증숏도 남겨 보자.
글·사진 김민수 에디터 곽서희 기자 취재협조 미야기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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