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록수 옛말, 다 말라죽어"…이대로면 '성탄 트리' 사라진다[르포]

예천(경북)=이승주 기자, 김지은 기자 2023. 12. 2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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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예천 은솔농장의 이우람 대표가 지난 18일 고사한 구상나무를 톱으로 베고 있다. /사진=이승주 기자


지난 18일 방문한 경북 예천의 조경수 농원 '은솔농장'. 30여종의 조경용 나무를 키우는 이우람 대표(42)는 앙상해진 구상나무를 보고 한숨을 내쉬다 나무 밑둥에 톱질을 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크리스마스 트리용 나무인 구상나무는 초록색 잎에 무성한 나뭇가지가 특징이다. 하지만 이날 본 구상나무의 잎은 초록빛이 아니라 바짝 메마른 붉은 빛깔이었다.

이 대표는 "원래 사시사철 푸른 상록수인데 계절이 무색한 날씨 때문에 색깔이 이렇게 변했다"며 "예전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나무를 키우는 사람 입장에서 6월 초엔 가뭄이다가 8월에는 비가 며칠 동안 퍼붓고 9월 전까지는 또 엄청 더운 이상기후를 절감한다"고 말했다.

기후변화의 충격이 전 세계적인 축제, 크리스마스에까지 손을 뻗었다. 성탄 트리로 가장 많이 이용되는 구상나무가 사라지고 있다. 원추형의 균형 잡힌 모양으로 자라 크리스마스 장식이나 조명을 설치하는 데 쓰이는 구상나무를 어쩌면 몇 년 뒤엔 볼 수 없게 될지 모른다는 얘기가 나온다.

크리스마스 트리의 모습./사진=뉴시스


은솔농장은 2017년 5만평 규모의 농지에 구상나무 1000그루를 심었다. 2018년 수해로 절반 이상이 고사했지만 최근 2~3년 동안 재배 규모는 500그루 수준을 유지했다. 문제는 올 여름 터졌다. 여름 장마가 한달 가까이 이어지면서 200여그루가 또 집단 고사했다. 현재 남은 구상나무는 250그루 남짓에 불과하다. 20그루가량이 추가로 말라죽을 위기라 내년 초면 남은 나무가 처음에 심은 나무의 5분의 1로 줄어들 수 있다.

이 대표는 "장마가 보통은 일주일인데 올해 장마는 한 달 가까이 이어졌다"며 "배수로를 만들었는데도 농장까지 물이 넘쳐서 물이 빠지는 시간이 없다 보니 나무가 숨막혀 죽은 것"이라고 말했다. 구상나무가 심어진 곳에서 두 발자국 정도 거리엔 아직까지도 물줄기가 급격히 흘러 흙이 파헤쳐진 흔적이 있었다.

구상나무 집단 고사가 지속되면서 농가 피해도 크다고 이 대표는 밝혔다. 구상나무는 묘목이 싼 편도 아니고 키우기도 까다로운 수종이다. 은솔농장이 지금까지 본 손해도 800만원이 넘는다. 이 대표는 "제천, 원주 등 대규모로 구상나무를 키우는 다른 농가의 사정도 비슷하다"고 전했다.

건강한 구상나무의 열매(위쪽 사진)와 달리 고사한 구상나무의 열매(아래쪽 사진)는 벌레가 파먹은 듯 갉아파내진 모습이었다./사진=이승주 기자


전국적으로는 은솔농장 같은 재배농장 외에도 지리산, 덕유산, 한라산 일대에서 자생하는 구상나무 역시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으로 보고된다. 녹색연합에 따르면 2010년 전후로 구상나무 집단 고사가 확인된다. 녹색연합이 2020년부터 지난해 8월까지 지리산 일대를 점검한 결과 최고 90%까지 고사가 진행된 서식지도 있었다.

구상나무가 자생하려면 적절한 수분 공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최근 겨울철에 눈과 비가 적게 오고 봄 기온은 상승하면서 땅이 건조해졌다. 명현호 국립공원연구원 기후변화연구센터 센터장은 "이번 겨울 들어 따뜻하다가 갑자기 추워지면서 감기 환자들이 급증한 것처럼 날씨 변동성이 커지면 식물이 받는 스트레스도 커진다"며 "나무도 환절기 때는 면역체계가 약해지는 셈"이라고 말했다.

구상나무의 고사는 구상나무만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한 종의 멸종은 전체 산림 생태계의 다양성 훼손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명 센터장은 "나무가 고사하더라도 종자는 남겨야 하는데 토양 조건이 척박해지면 침엽수종 종자가 성장 자체를 하기 어렵다"며 "특히 구상나무는 우리나라의 대표 고유종인데 한국에서 사라지게 되면 전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건강한 구상나무의 경우 잎 앞면은 진한 초록색이고 뒷면은 은색으로 빛난다. 하지만 고사하는 과정에서 잎은 붉게 물들고 이후에는 잎과 나무 껍질이 모두 떨어져 하얀색으로 변한다.


구상나무 외에도 최근 기후변화로 국내에서만 7대 수종이 위기관리종이 됐다. 이규명 산림청 산림생태복원과장은 "구상나무를 포함해 분비나무, 가문비나무, 눈잣나무, 눈측백, 눈향나무, 주목 드 7대 수종을 위기관리종으로 선정, 집중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상돈 이화여대 환경공학과 교수는 "현재 강수량이나 산림 경사 등을 고려해 기존 서식지와 비슷한 곳으로 식물을 옮기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며 "구상나무도 기존 서식지보다 해발고도가 더 높은 지역으로 이주시켜 구상나무가 잘 적응하고 있는지 실험 중"이라고 말했다.

예천(경북)=이승주 기자 green@mt.co.kr 김지은 기자 running7@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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