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 없는 세계로 한 걸음 다가가는 인류... 그러나 아직 이르다 [세계사로 읽는 경제]
돌(petra)과 기름(oleum)의 라틴어 합성어 석유
BC 4세기, 중국서 처음으로 석유 추출해 연료화
1850년대 미국서 석유산업 본격화, 필수재로
중동 석유, 2차 대전 후 영토 불모지에서 비롯
두 차례 오일 쇼크 거치며 ‘강력한 무기’로
COP28, "지구온난화 주체, 화석연료" 첫 지목
의미 있으나 중동의 석유 파워 쉽게 안 꺾일 듯
편집자주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숫자로 표현되는 경제학 역시 오랜 역사를 거치며 정립됐습니다. 어려운 경제학을 익숙한 세계사 속 인물, 사건을 통해 쉽고 재미있게 풀어보려 합니다. 경제 관료 출신으로 울산과학기술원(UNIST) 글로벌산학협력 센터장으로 근무하는 조원경 교수가 들려주는 ‘세계사로 읽는 경제’는 3주에 한 번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석유가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19세기 중엽이다. 양산돼 생활화된 것은 20세기다. 불과 1~2세기 만에 인류가 석유 없이 살 수 있는 시대를 꿈꾸고 있다니 놀랍기도 하다. 2050 탄소중립과 함께 인류는 석유 없는 시대를 살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영국이 2030년으로 예정한 신규 내연기관차 판매 금지 시기를 5년 늦추기로 했다. 11월 30일부터 12월 12일까지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8)가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서 열렸다. 개최국 UAE의 국영 석유회사 애드녹(ADNOC)은 2030년까지 석유 채굴을 위한 시추를 42% 늘리려 한다. 화석연료의 단계적 퇴출은 희망 사항일 뿐 산유국들의 석유패권은 여전하다. 휘발유를 연료로 하는 자동차가 월등히 전기자동차보다 비중이 높은 게 현실이다. 에너지 안보와 에너지 전환의 한가운데서 석유의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크다 하겠다.
석유란 영어 단어 petroleum의 어원은 돌(petra)과 기름(oleum)이란 라틴어의 합성어다. 그 역사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에서는 기원전(BC) 4세기에 처음으로 석유를 추출해 연료로 사용했다. 중국 송나라 관료 심괄의 저서 몽계필담에 석유(石油)라는 용어가 나온다.
고대인은 자연 상태에서 지표면에 스며든 석유의 존재를 알아챘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건축물 방수용으로 석유를 활용했다. BC 400년경 페르시아 군대는 그리스를 공격하며 화살촉에 석유를 발라 불화살로 사용했다. 조로아스터교는 신전 성화에 기름을 이용했다.
중국에서 최초 석유 채굴은 서기 347년경이다. 유정을 240m까지 파 내려가 석유를 뽑아 올렸다(염정시추(鹽井試錐) 굴착법). 당시 굴착기로는 대나무를 연결하고 끄트머리에 드릴을 부착해 활용했다. 이렇게 캔 기름은 소금을 건조하는 데 썼다.
7세기에 일본에서 석유는 불타는 물로 알려졌다. 중동지역에서 유전은 9세기 아제르바이잔 바쿠 지역에서 개발됐다. 동방견문록으로 유명한 마르코 폴로는 이 지역이 수십 척의 배에 실을 석유 물량을 생산했다고 기록한 바 있다. 당시 정제기술은 증류기에서 등유를 추출하는 수준이었다. 12세기에 이슬람이 스페인을 침공하면서 석유정제법이 유럽에 전해졌다.
1745년 러시아 우카타 지역에 석유 추출과 정제 시설이 만들어졌다.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 알자스 지방에서도 오일샌드가 채취됐다. 중국이 소금을 얻기 위해 사용한 이 시추법은 1830년경에 유럽으로 전파되고 미국의 석유시추에 힌트를 줬다.
본격적인 석유산업은 1850년대 미국에서 출발했다. 벤처 자본가인 조지 비셀, 에드윈 드레이크, 벤저민 실리먼이 역사의 주인공이다. 당시까지 석유는 두통, 치통, 위경련, 류머티즘 등의 치료에 의약품으로 쓰이고 있었다. 이들은 모험자본 성격이 강한 석유시추 투자자금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예일대 화학교수에게 조사 용역까지 의뢰한 후 시작한 사업이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석유가 지하의 석탄 광맥에서 떨어지는 기름방울이라고 생각하던 시대에서 그런 생각은 당연했다. 이들 중 드레이크가 1858년 봄 석유시추에 나섰다. 당시 원유는 지표면에 구덩이를 파 채취했다. 드레이크는 바다 우물인 염정을 파 내려가는, 중국에서 유래한 방식을 시도했다. 쇠막대기 끝에 드릴을 부착해 회전시켜 땅속에 진입시키는 방식이다. 그는 드릴을 박기 위해 증기기관을 구입하고 염정 기술자를 불러 모았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끝에 1859년 8월 27일 수직 굴착식 석유시추를 성공했다. 이는 석유양산의 시작으로 산업으로서의 석유의 성공 시초를 연 사건이다.
당시 하루 생산량은 30배럴로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시작은 창대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들의 성공은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가 시들해진 틈을 타 많은 돈이 검은 황금으로 불린 석유로 몰리게 했다. 오일 러시가 급속하게 텍사스와 캘리포니아로 확산되자 모두가 영화 자이언트 속의 제임스 딘처럼 석유로 횡재하기를 바랐다.
메인주에서 캘리포니아주에 이르기까지 석유는 미국인의 삶에 등불을 밝혔다. 기계의 윤활유로 기술·제조·가정생활 할 것 없이 모든 분야에서 석유는 필수재로 등장했다. 이는 세계 경제와 문명의 진보를 의미했다. 세기의 부자 록펠러는 갖은 수단으로 미국 정유공장의 90%와 운송회사의 80%를 장악했다. 오일 붐이 한창이던 20세기 초 로스앤젤레스는 재즈 시대의 쿠웨이트였다. 세계 최초로 자동차 문화가 시작됐다. 석유로 고속도로가 생겼으며 할리우드가 탄생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석유는 전쟁 필수품인 자동차와 항공기 연료로 사용됐다. 베네수엘라, 러시아, 인도네시아에 이어 1938년에는 중동의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에서도 유전이 발견됐다.
석유 하면 중동이 떠오르지만 그 역사는 100년도 안 된다. 1차 대전이 끝나고 오스만 제국이 붕괴되자 아랍 세계가 들썩였다. 맹주 자리를 놓고 각개약진이 시작됐고 이 중 두각을 나타낸 게 아라비아 반도의 사우드 가문과 하심 가문이다. 사우드 가문에서 사우디아라비아가 나왔고 하심 가문에서는 요르단과 이라크가 나왔다.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에 당시 유럽 열강들은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영토라고 선언한 것이 대부분 사막이었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불모지였다. 이후 사막에서 석유가 쏟아져 나왔는데 건국으로부터 불과 6년 후의 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제2차 세계대전도 영토획득에 눈이 먼 석유전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유전이 풍부한 미국이나 넓은 식민지를 보유한 영국과 달리 전쟁을 일으킨 독일, 이탈리아와 일본은 석유가 없었다. 중동에서 석유를 확보한 연합군은 승리했으나 이란과 러시아를 침공해 유전을 차지하겠다는 히틀러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태평양에서는 일본이 원유를 위해 버마와 인도네시아를 침공했지만 미국의 반격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굴복했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중동의 이란과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거대 유전들이 발견되면서 세계는 안정된 가격으로 석유를 사용했다. 독립한 신생국가들은 석유에 대한 자원민족주의를 부르짖으면서 1960년에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결성했다. 이들은 석유산업을 국유화해 외국 기업을 몰아내고 최근까지 국제유가를 결정하는 막강한 힘을 가지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두 차례의 오일 쇼크가 발생했고 모든 상품의 어머니인 원유가 ‘강력한 무기’로 떠올랐다. 2008년에 시작된 미국의 셰일오일 혁명으로 석유가 풍부해졌다. 2015년 기후변화협약의 체결로 화석연료의 장기적 전망이 불투명해졌다. 근래 중동 지역 밖에서 원유가 많이 생산되는 반면 소비는 증가하지 않았다. OPEC의 지배력은 약화됐고 한때 석유 권력을 미국의 셰일오일에 넘겼다고 보는 시각도 등장했다.
올해 COP28 최종 합의문에서 무엇보다 기후변화의 원인인 지구온난화를 일으키는 주체로 '화석연료'를 공식 지목했다. 1995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첫 총회 이후 당사국들이 석유와 천연가스, 석탄을 아우르는 화석연료 의존에서 벗어나기 위한 공동의 움직임에 합의했다.
산유국의 강력한 반대로 석유를 명시하진 못했지만 진통 끝에 화석연료라는 표현이 일단 국제적 기후변화 대책 회의의 최종 합의문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사우디의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석유 중심에서 벗어나 경제를 다변화하려 한다. ‘사우디 비전 2030’을 걸고 네옴 시티와 같은 미래 에너지형 신도시를 건설 중이다. 하지만 뒤로는 개발도상국의 화석연료 사용을 늘리기 위해 석유 수요 지속가능성 프로그램이라는 투자 계획도 비밀리에 밀고 있다. 전통에너지와 신재생에너지의 싸움은 현실과 미래 권력이라는 관점에서 오늘도 ‘밀당’ 중이다. 포스트 오일을 꿈꾸는 중동이라도 오일의 종말을 섣불리 꺼내는 것은 너무 이른 감이 느껴진다. 그래도 물가안정을 저해하는 급격한 유가 상승은 없을 것이라 위안이 된다.
조원경 UNIST 글로벌산학협력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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