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세이] 선도자와 추격자
오래전 학창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시험을 치르는 장면을 떠올려 본다. 시험문제의 정답을 구하기 위해 긴 지문을 읽고 보기가 적합한지 따져보거나, 문제 풀이에 필요한 원리나 공식을 적용하여 계산하고 답을 구하느라 모두 분주하다. 흔히 커닝이라고 일컫던 부정행위를 하지 않는 한, 모르는 문제의 답을 찾아내는 다른 방법은 운에 맞기고 찍는 방법밖에 없는데, 한 가지 예외가 있었으니, 영어듣기 시험시간이었다. 지금도 수능 영어듣기평가 시간에는 시험에 방해되지 않도록 항공기 이착륙이 금지되고 있는데, 그래서 학생들의 움직임이나 OMR카드에 정답을 마킹하는 소리도 크게 들릴 정도다. 이것이 답을 구하는 하나의 방법이었으니, 평소 영어성적이 우수한 학생이 듣기평가를 듣다가 답지에 마킹을 하면 방금 나왔던 보기가 정답이라고 유추하는 것이다.
시험 상황에서는 편법이나 요령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앞서가는 다른 사람 또는 기관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는지 참고하는, 흔히 벤치마킹이라고 부르는 이 방법은, 문제와 관련된 규칙이나 원인을 파악하여 해결하는 정석적인 방법과 더불어, 매우 효율적인 문제해결 전략의 하나이다. 정석적인 문제해결은 문제의 근본 원리와 원인을 파악하여 해결함으로써, 근본적인 해결, 재발 방지, 창의적이고 다양한 해결책 도출이 가능하지만, 시간과 노력이 많이 소요되고 때로는 해결책을 얻지 못하기도, 즉 실패하기도 한다. 이에 비해 우수한 선도자를 따라 하는 방법은 시간과 노력이 절약되고, 선행 사례가 있으므로 실패가능성도 낮다. 그렇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고, 재발 가능성이 있으며, 무엇보다 따라 할 선도자가 없으면 시도할 수 없는 방법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두 가지 방법은 상황에 따라 적절히 활용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삼성과 현대가 과거 소니와 도요타를 선도자로 하여 빠르게 추격하는 전략이 유효했다면, 이제는 스스로 선도자가 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올해 마지막 ‘과학에세이’를 쓰면서 한 해를 돌이켜보니, 챗GPT로 대표되는 생성형 인공지능과 환경, 에너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등 크고 작은 이슈들이 있었다. 특히 내년 과학기술 연구개발 예산 삭감은 그 여파가 커서 여러 필진에 의해 반복해서 다뤄졌고, 과학관에 근무하는 필자와 관람객에게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과학관을 누구나 찾을 수 있는 과학문화 공간으로 조성하고자, 말하기가 불편한 농인들이 과학관을 관람할 때 소통에 도움 되는 인공지능 수어 서비스를 개발하는 과제를 부산대학교와 공동으로 2년간 진행하기로 했는데, 앞선 시도이고 개발이 완료되면 다른 기관에 확산되어 농인과 일반인이 활용할 가능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내년 2년 차 과제수행이 불투명해진 것이다.
정부가 연구개발 예산을 삭감하는 과정에서 의견수렴 과정이 없었다거나, 카르텔의 실재 유무에 대한 반론, 예산 삭감의 실효성 등에 대해서는 충분히 문제 제기가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는 예산의 비효율성, 즉 투입되는 연구비에 비해 연구 성과가 기대에 못 미친다는 의견에 대해 문제해결방법의 차원에서 언급하고자 한다. 전반적인 연구개발 예산을 삭감하는 대신 글로벌 연구개발 예산을 확대했는데, 그렇게 하면 세계적인 연구 성과가 나올 것인가?
세계적인 연구개발 성과는 앞선 누군가를 따라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즉 남들이 하지 않은 것을 실패 가능성을 안고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노력해서 이룰 수 있다. 글로벌 연구개발을 확대하면 세계적으로 우수한 연구집단과 공동연구를 확대하게 된다. 그러면 최선의 결과는 그들과 함께 우수한 연구 성과를 얻을 뿐, 우리가 독자적으로 세계 최고의 연구 성과를 얻지는 못한다. 그것은 여전히 빠른 추격자 전략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차관조차도 강연에서 핵심 분야 글로벌 협력이 쉽지 않음을 토로했다고 한다. 추격자에게 쉽게 쫓아오도록 허용하는 선도자는, 비록 학문 분야에서라 하더라도, 있을 수 없다.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이제 영어듣기평가에서 우수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이 정답 힌트를 얻지 못하도록 일부러 다른 보기에서 마킹을 한다고 하니 실력을 키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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