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고에서 찾아낸 유물이야기] <83> 덩이쇠(鐵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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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에서 철기 사용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덩이쇠는 철을 납작하게 두드려 만든 쇳덩이로 정의되는 유물이다.
복천동고분군은 우리나라에서 덩이쇠가 가장 많이 나온 고분군으로, 삼국시대 부산 지역의 활발했던 철기 생산 면모와 우월한 지위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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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에서 철기 사용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석기시대에 인류가 사용한 도구는 돌이다. 돌 도구를 썼던 시대에는 인류 문명 발달 속도가 매우 느렸다. 이후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청동으로 무기·장신구 등을 만들어 썼으나, 청동은 철보다 튼튼하지 못했고 용도도 다양하지 못했다. 철은 이전에 쓰인 청동보다 단단해 무기나 농·공구 제작의 중요 소재가 됐다.
한반도에는 기원전 3, 4세기께 연(燕)나라의 주조철기(鑄造鐵器)가 북부 지역에 처음 전래했고 남부지방에는 그보다 늦은 기원전 2세기께 철기문화가 전개됐다. 철기시대에 접어든 이 시기부터 한반도 남부에 삼한시대가 시작되고, 한민족 문명과 문화는 급속하게 발전한다.
부산은 한반도 철기 문명 전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지역으로, 부산 동래구 복천동 내성 유적의 단야(鍛冶) 흔적을 통해 부산 지역 철기 생산의 시작을 알 수 있다. 4, 5세기 부산 복천동고분군에서는 다량의 철기 유물이 출토돼 삼국시대에 부산은 김해와 함께 수준 높은 철기 문명을 꽃피웠음을 알 수 있다.
이번에 소개하는 유물은 부산 복천동고분군에서 출토된 덩이쇠(鐵鋌)이다. 덩이쇠는 철을 납작하게 두드려 만든 쇳덩이로 정의되는 유물이다. 요즘 제철소에서 만드는 큰 철판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고, 삼한시대 널무덤에서 나오는 판상철부에서 기원했다. 판상철부의 날이 형식적으로 만들어져, 판상철부형 덩이쇠로 변화한 뒤, 납작한 철판 중앙 부분이 잘룩하고 양 끝으로 갈수록 폭이 넓어지는 덩이쇠로 변화한다. 복천동고분군에서는 4세기 중엽부터 덩이쇠가 무덤 바닥에 깔려 5세기대에 가장 크게 유행하다가 6세기 초가 되면 사라진다.
부산 복천동 38호 출토 덩이쇠는 서쪽 할석단의 남쪽으로 치우친 부분에서 10매씩 겹친 채로 두 군데서 출토됐다. 이번에 소개하는 덩이쇠는 전체 길이가 36.2㎝, 최대폭은 14.3㎝이다. 끈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양쪽 가장자리를 감아 묶은 뒤 10매를 겹쳐 매납한 것으로 보인다. 5세기 대 덩이쇠는 10의 배수로 부장되는 특징이 있었다.
덩이쇠는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변진조’의 “나라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한, 예, 왜가 모두 와서 가져갔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에 철을 썼으며 마치 중국의 돈과 같이 사용되었다”는 기록의 실물로 추정하며, 화폐로 썼을 것으로 보았다. 금속학적 분석 결과 도구로서 강인하지 못해 철기 제작을 위한 중간 소재로 보았다. 화폐와 중간 소재 기능을 모두 가진 것이라는 설도 제기됐으며, 매지권(買地券)과 위신재(威身材)의 기능도 제기됐다. 복천동고분군은 우리나라에서 덩이쇠가 가장 많이 나온 고분군으로, 삼국시대 부산 지역의 활발했던 철기 생산 면모와 우월한 지위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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