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명 이사회가 쥐고 흔든다, 최고 명문 ‘하버드 비밀법인’ 논란
미국 월가(街)의 헤지펀드 거물 빌 애크먼 퍼싱스퀘어캐피털 회장은 25일(현지 시각)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에 “믿을 만한 소식통에게 들은 얘기”라면서 이런 글을 올렸다. “‘하버드 코퍼레이션(Havard Corporation·하버드대 법인 이사회)’이 클로딘 게이 총장에게 사임을 요구했는데, 총장은 거부하고 있다고 한다. 이사회는 (총장에게 휘둘리는) 잘못된 선택을 함으로써 하버드와 이사회를 더 깊은 구렁텅이로 빠뜨렸다.” 순자산이 35억달러(약 4조6000억원)이나 되는 유대계 애크먼은 모교(母敎) 하버드에 거액을 기부해온 대표적 ‘큰손’이다.
지난 10월 발발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과 관련해 하버드대가 반(反)유대주의를 용인했다는 공격을 받고 있는 가운데, 하버드대 클로딘 게이 총장의 유임을 결정한 이사회의 비밀주의와 불투명성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고 있다. 게이 총장은 반유대주의에 이어 논문 표절 의혹도 받고 있다. 하지만 하버드 이사회는 총장을 두둔하며 유임을 결정했고, 구체적 표절 내용도 밝히지 않는 중이다. 비슷한 반유대주의 논란으로 펜실베이니아대 총장이 최근 사퇴한 것과 대조적이다. 게이 총장과 엘리자베스 매길 당시 펜실베이니아대 총장은 지난 5일 연방 의회 하원 청문회에서 학생들의 반유대주의 언행을 강력하게 비난하지 않고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인 것이 문제가 돼 논란에 휘말렸다.
‘하버드 코퍼레이션’이라고 하는 하버드 이사회가 유독 큰 논란에 휩싸인 것은 독특한 구성 및 운영 방식과 연관이 있다. 세계 최고 명문인 하버드대는 미국이 독립하기 140년 전이 1636년, 이민자들이 모여 만든 매사추세츠 자치 기구가 설립을 인준해 2년 뒤 수업을 시작했다. 미국의 첫 대학이라는 점을 내세우는 하버드대는 ‘하버드 코퍼레이션’이 ‘서구의 가장 오래된 법인’이라고 하면서 각별한 자부심을 보여 왔다. 문제는 ‘독특한 전통’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유지되고 있는 폐쇄적 의사 결정과 내부인을 향한 온정주의다. 뉴욕타임스(NYT)는 24일 “하버드대 내부에서도 이사회의 운영 방식에 대한 비난과 세대교체 요구가 거세게 일고 있다”고 전했다.
NYT와 월스리트저널(WSJ), 워싱턴포스트(WP)등 미국 주요 언론은 게이 총장의 거취를 둘러싼 이사회의 최근 행태가 이 비밀스러운 조직의 운영과 관련한 문제를 일시에 표출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버드 이사회는 게이 총장 유임을 발표하면서 ‘그를 전적으로 신뢰한다’ 등 두루뭉술한 이유만 몇 가지 적은 성명서를 발표하는 데 그쳤다.
같은 성명엔 미 언론이 지난 10월 게이 총장의 1997년 박사 학위 논문 표절 의혹을 제기한 데 대한 이사회의 결정도 담겼다. 역시 게이 총장의 편을 들어 ‘하버드 기준에는 부합한다. 하지만 게이 총장이 자발적으로 수정하기로 했다’는 설명으로 넘어갔다. 어느 부분이 문제였고 이에 대해 이사회가 무슨 조치를 취할지에 대해선 언급하지도 않았다. 하버드 이사회의 이런 조치는 지난 1월 논문 데이터 조작과 관련한 논란이 일자마자 연방 검사 출신 등 내·외부 전문가로 구성한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전면적인 조사에 나선 스탠퍼드대 이사회와 대조된다. NYT는 “게이 총장을 둘러싼 혼란 가운데 비밀스럽고 강력한 조직인 법인 이사회는 일치단결한 모습을 보인다. 이사회 구성원 중엔 당사자인 게이 총장도 있다”며 이사회를 직격했다.
‘하버드 코퍼레이션’을 구성하는 이사들은 모두 하버드대에서 학사·석사·박사 학위 중 하나를 받은 동문이다. 이사회 정원은 한때 7명이었다가 13명으로 늘었고, 현재는 한 명이 공석인 12명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중 한 명은 당연직인 총장이다. 현재 이사진엔 케네스 셔놀트 전 아메리칸익스프레스 최고경영자(CEO) 등 기업인, 마리아노 구엘라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사장, 페니 프리츠커 전 상무장관 등 기업인·정계에 몸담은 동문들이 참여 중이다. 이들을 어떻게 선정하는지는 공개되지 않았는데, NYT 등은 그만두는 이사가 후임을 추천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하버드의 폐쇄성은 다른 아이비리그 대학들과 비교해도 두드러진다. 예일대는 법인 이사회에 총장을 포함한 학교 측 구성원 17명 외에 캠퍼스가 있는 커네티컷주의 지사·부지사가 당연직으로 오른다. 다트머스대 역시 24인 법인 이사회에는 관할 주인 뉴햄프셔 주지사가 참여한다. 브라운대의 법인 이사는 51명이고 이 중에는 학부 학생회장을 지내고 다른 학교 경영전문대학원으로 진학한 학생 출신도 있다. 학교마다 일반 기업 이사회와 마찬가지로, 폐쇄성을 최소화하고 객관적 판단을 유도할 수 있는 ‘장치’를 갖춰놓은 것이다.
비밀스러운 ‘하버드 코퍼레이션’의 작동 방식에 대한 논란이 거세지면서 총장뿐 아니라 이사진도 교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키트 파커 하버드대 생명공학과 교수는 WSJ에 이사회를 겨냥해 “그들은 얼마나 오만하다는 말인가. 하버드는 중대 기로에 섰고 지금 이사들은 내려와야 한다”고 썼다. 일각에선 게이 총장과 그를 신임한 법인 이사회에 대한 비판 여론 배후에는 언론계와 금융계를 주름잡고 있는 유대인 권력이 있는게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의회 청문회에서 반유대주의를 즉각 비난하지 않은 게이 총장의 모습에 격노해 그를 내치기 위해 암묵적 협력을 이어가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유대계인 루스 마커스 WP 부편집장은 23일 기명 칼럼에서 “미국 최고 명문대의 총장에 적합하지 않은 게이 총장은 사퇴해야 한다”고 썼다. 애크먼은 이 칼럼을 자신의 X에 재전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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