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러시아 수렁… 기업들 철수도 못하고 눈물의 버티기

구특교 기자 2023. 12. 26.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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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모스크바에 강추위가 몰아쳤던 17일, 한국과 러시아를 오가며 사업을 하는 A 씨의 현대자동차 '스타리아' 유리창 한 면이 갑자기 와장창 깨졌다.

러시아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 대한 철수 지원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러시아에서 유통업을 하는 한 중소기업의 대표는 "전쟁 전에는 KOTRA 등 한국 정부가 중소기업 제품 홍보를 많이 도와줬는데 지금은 모두 끊겨 각자도생해야 한다"며 "철수를 하고 싶어도 매각에 드는 비용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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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40개 업체 “사실상 운영 스톱”
전쟁 이후 투자액 10분의1 토막… 자산 매각 막대한 손실 각오해야
공들인 판매망 단절도 철수 발목
“정부, 저금리 대출 등 지원 필요”
17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물류 사업을 하는 A 씨 소유의 현대자동차 스타리아 유리창이 추위로 깨진 모습. 부품 수급 문제로 유리창 교체에만 3개월 이상 걸려 비닐로 유리창을 막은 채 운행하고 있다. 독자 제공
러시아 모스크바에 강추위가 몰아쳤던 17일, 한국과 러시아를 오가며 사업을 하는 A 씨의 현대자동차 ‘스타리아’ 유리창 한 면이 갑자기 와장창 깨졌다. 실내외 급격한 온도 차로 발생한 파손이었다. A 씨는 러시아 현대차 수리센터를 찾았다. 하지만 “부품이 없어 3개월 이상 기다려야 한다”는 답변만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뚫린 창에 테이프로 비닐만 붙인 채 임시방편으로 운전 중이다. 그는 “현대차 공장도 철수를 발표했고 부품까지 안 들어오니 수리가 안 된다”며 “러시아에 진출한 대부분의 국내 기업들도 철수만 못 했을 뿐 사실상 운영을 멈춘 것과 같다”고 말했다.

현대차가 러시아 현지 공장을 1만 루블(약 14만 원)에 ‘헐값 매각’하며 철수를 감행했지만 나머지 대다수 한국 기업들은 러시아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자산 매각에 따른 막대한 손해와 브랜드 가치 하락, 네트워크 손실 우려 등이 발목을 잡고 있다. 러시아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 대한 철수 지원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25일 본보가 KOTRA에서 입수한 ‘러시아 현지 국내 기업 현황’에 따르면 이달 20일 기준 총 140개 기업이 러시아 현지에서 활동 중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인 지난해 3월 3일 러시아 내 한국 기업은 총 151곳이었다. 그 이후 1년 9개월이 지났지만 11곳만 줄어드는 데 그쳤다.
남아있는 한국 기업들의 현지 투자액은 전쟁 전의 약 10분의 1로 줄어들었다. 올 1∼10월 러시아 내 국내 기업의 투자액은 1000만 달러(약 130억 원)에 불과했다. 전쟁 전인 2021년에는 1억3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그만큼 기업 활동이 저조하다는 의미다.

러시아에서 제대로 기업 활동을 하지 않는 상황임에도 러시아를 떠나지 못하는 데는 자산 매각에 따른 손실 영향이 크다. 올 3월 러시아는 해외 기업이 자국 내 자산을 매각할 때 자산가치 50%만 인정하고, 의무적으로 5∼10% 기부금을 납부해야 한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현대차처럼 막대한 매각 손해를 감수할 자금력이 돼야 철수도 가능한 것이다. 수년간 공들여 온 러시아 내 공급망과 지배력을 한순간 중국 등 친러 기업에 내주게 된다는 걱정도 크다.

현재 러시아에 남아 있는 한국 기업은 대기업 36개, 중소기업 88개, 기타 16개로 중소기업이 가장 많다. 러시아에서 유통업을 하는 한 중소기업의 대표는 “전쟁 전에는 KOTRA 등 한국 정부가 중소기업 제품 홍보를 많이 도와줬는데 지금은 모두 끊겨 각자도생해야 한다”며 “철수를 하고 싶어도 매각에 드는 비용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러시아를 상대로 물류업을 하는 B 씨는 “러시아 금융 제재로 대금 환수가 어려운 게 가장 큰 애로사항”이라고 했다.

삼성전자와 LG전자의 러시아 공장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2년 동안 모두 멈춰 있다. 상품 수출과 대금 결제 모두 막히다 보니 전자 제품도 판매가 막혀 있다. 현대차와 함께 러시아에 진출한 그룹 계열사 현대모비스와 현대위아, 현대오토에버 등도 철수 고민이 커진 상황이다. 한계에 도달한 기업들이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고 한꺼번에 ‘탈출 러시’에 나설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도원빈 한국무역협회 연구원은 “러시아 현지 국내 기업들이 매각하는 데도 큰 손해를 봐야 하니 국내 복귀가 부담스러운 것”이라며 “정부가 현지 기업에 저금리 대출을 돕고 외교적 상황을 고려해 철수 비용을 완화해주는 방안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구특교 기자 koot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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