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누가 인권위를 이렇게 만들었나
하필 세계인권선언 기념일이 12월10일이라 인권활동가는 연말이면 괴롭다. 저마다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보는 일에 인권의 시선으로 우리 사회를 돌아보는 일이 뒤섞이니 이런 식이다. 나 열심히 살았는데 세상 왜 이래?
올해는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마음을 더욱 착잡하게 한다. 12월8일 인권단체들은 ‘경로이탈 국가인권위 바로잡기 공동행동’을 발족했다. 말로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모욕하는 것을 넘어 피해자가 진정하거나 긴급구제를 신청할 때 손쉽게 기각하려는 운영규칙 개악이 인권위에서 시도되고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 들어 임명된 이충상, 김용원 두 상임위원이 경로이탈을 주도하고 있다. 그런데 과거와 양상이 조금 다르다.
이명박 정부는 먼저 선전포고를 했다. 인권위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만들겠다며 독립성을 노골적으로 부정했다. 국내외 항의가 쏟아지며 직속기구화 시도는 포기했지만 인권위 조직을 축소하고 무자격 인사를 인권위원장으로 임명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인권위는 침묵하는 기구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이와 달리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당시부터 지금까지 인권위에 관해 일언반구가 없다. ‘윤심’ 위원들이 있으니 굳이 직접 거론하며 논란을 부를 필요가 없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보다 깊고 오래됐다.
제도화된 ‘인권’만 보면 보이지 않는다. 인권의 제도화는 김대중 정부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001년 인권위 설립은 그 상징이다. 그러나 한국사회 전체를 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신자유주의가 전면화되면서 경제사회 구조가 빠르게 재편되던 시기다. 정리해고에 저항하는 노동자에게 곤봉을 휘두르던 정부에서 인권위가 설립된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함께 온 인권의 제도화는 인권의 외주화와 다를 바 없었다. ‘니’가 해라, 인권.
인권위 독립성에 관해 회자되는 에피소드가 있다. 2003년 인권위가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자 정부 일각에서 ‘항명’이라는 반발이 일었다.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권위는 이런 일을 하라고 만들어진 것”이라며 논란을 일축했다. 인권위를 존중하는 대통령의 모범처럼 언급되지만 함정이 있다. 인권위는 혼자 입바른 소리 하라고 만든 기구가 아니다. 쓴소리는 듣지만 듣는 것으로 그친다면 또 다른 무시가 된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사회경제적 균열과 갈등이 심각해지면서 혐오와 배제가 확산됐다. 인권이 자리잡기도 전에 백래시가 함께 성장했다. ‘인권’이 국민의 일자리를 빼앗고 가족과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다고 주장하는 세력이 극성스러워졌다. 2010년대 각종 인권조례는 제정과 함께 폐지 논란에 휩싸였고 차별금지법은 공공의 적으로 지목당했다. 문재인 정부는 인권위를 제자리로 돌려놓았지만 인권을 되살리진 않았다. 인권의 원칙에 합의를 높이는 대신 인권을 논란에 방치했다. 인권위가 기댈 인권의 힘이 흔들리는 만큼 인권위의 무게도 가벼워졌다. 인권위가 쓴소리를 한들 특정 집단의 주장으로 치부되기 쉽고 정부로서는 ‘항명’이라며 반발할 이유도 먼저 선전포고할 이유도 줄어들었다.
정부로부터 ‘인권’을 지키는 동시에 사회로부터 인권을 다시 세워야 하는 상황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열심히 살았는데 세상 왜 이래? 우습게도 절망으로부터 건져주는 질문이 이렇다. 언제라고 달랐나?
인권의 시선으로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내고 인권을 이정표 삼아 대안을 제시하며 존엄과 평등이 실현되는 국가를 만들자. 인권위는 그래서 세운 기구다. 인권운동이 먼저 그런 꿈을 품었기에 세울 수 있었다. 정부가 인권위를 들었다 놨다 해도 수많은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인권활동가들은 그 꿈을 내려놓은 적이 없다.
누군가 사람답게 살고 싶다 마음먹는 순간 인권을 떠올리는 한 인권은 저물지 않는다. 내일이 어떻든 오늘 물러서지 않는 우리에게 따뜻한 안부를 보내도 충분하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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