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 카르텔과 ‘낙인 찍기’
인터넷에서 타인과 소통하고 싶다면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사이버 세상에서 쓸 나만의 이름, ‘닉네임’을 정하는 일이다. 미용실 체험 수기를 작성하든 타인과 정치 토론을 벌이든 닉네임은 필요하다. 요즘에는 남의 닉네임을 컴퓨터 모니터에서 볼 뿐만 아니라 공개 장소에서 들을 일도 많다. 커피 판매점에서다. 커피 판매점 직원들은 “○○ 고객님!”이라고 힘차게 닉네임을 호명하고는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한 잔 나왔습니다”라고 매장에서 외친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닉네임을 무엇으로 할지 고민한다. 재치 있고, 의미 있는 닉네임을 지으려고도 하지만, 예의 없고 부정적인 닉네임을 짓지 않으려고도 애쓴다.
올해 과학계에도 닉네임 하나가 붙었다. ‘카르텔’이다. 카르텔의 정의는 ‘동일 업종의 기업이 경쟁의 제한 또는 완화를 목적으로 가격과 생산량 등에 대해 협정을 맺는 일’이다. 우리말로는 ‘담합’이다. 경제 용어지만, 다른 분야로도 확장돼 쓰인다. 확실한 것은 좋은 뜻이 아니라는 점이다. 당연히 과학계가 원해서 붙은 닉네임이 아니다.
카르텔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계기는 지난 6월이다. 당시 윤석열 대통령은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연구·개발)는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카르텔이라는 용어를 직접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권에서는 과학계를 향해 카르텔이라는 용어를 공개적으로 사용했다. ‘줄줄 새는’ R&D 예산을 잡아내겠다는 결기까지 느껴졌다. 그 결과가 올해보다 4조6000억원 줄어든 내년 정부 R&D 예산이다.
과학계에 정말 카르텔은 있었을까. 답은 최근 정부 태도에서 알 수 있다. 요즘 R&D 주무 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비효율화’라는 용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카르텔이 실존하느냐”는 취지의 언론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두 용어 사이의 ‘결’은 다르다. 카르텔은 법적 처벌 대상에 가깝지만, 비효율화는 제도 개선 대상이다.
카르텔이라는 용어를 피하려는 가장 유력한 이유는 공개적으로 보여줄 만한 카르텔 사례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22일 이종호 과기정통부 장관은 “카르텔에 8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 자신의 소속 부처 차관의 이달 초 발언에 대해 “순전히 개인적 의견”이라며 선을 긋기까지 했다.
정리하자면 카르텔이라는 용어는 과학계에 찍힌 부당한 ‘낙인’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찍힌 낙인의 가장 큰 문제는 내년 R&D 예산이 대폭 줄어든 것 이상의 파장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우주 개발에서 볼 수 있듯 현대 과학은 진보 과정에서 인력과 장비를 갖추기 위해 막대한 세금이 필요하다. 그런 세금을 내는 국민에게 과학계를 ‘짬짜미해 예산을 나눠 갖는 집단’으로 보이게끔 했다. 이는 이후 과학계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에 오랫동안 영향을 줄 것이다. 카르텔이란 용어는 대한민국 과학 연구의 근간을 흔든 셈이다.
물론 R&D 예산도 국가 재정 상황에 따라 감축될 수는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R&D는 궁극적으로 과학자가 아니라 국민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객관적이지 않은 판단으로 국가 장래를 어려움에 빠뜨리는 일이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정호 산업부 차장 r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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