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동의 사소한 물음들] 나의 직업은 텔레마케터였다
지난 시절 나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시인’이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2011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로 수배받던 시절 어느 보수언론 기자가 나에 대한 심층 기사에서 시인의 탈을 쓰고 평택대추리 미군기지 이전확장 반대,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 용산 철거민 진상규명 투쟁 등 현장만 쫓아다니는 전문시위꾼이라고 한 게 오히려 나의 정체성에 어울렸다. 시인을 가장한 전문시위꾼에 이은 나의 직업은 오히려 텔레마케터에 가까웠다. 무제한 요금제가 없던 시절에는 전화통화료만 20만원 넘게 나와 절망하던 때도 많았다. 하루에도 똑같은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되뇌다 보면 입이 돌아가려 하기도 했다. 세 번째 직업이라면 외판원이 맞다. 시도 때도 없이 투쟁 기금 마련을 위한 티켓과 물품을 팔아야 했다.
그리고 네 번째 직업이라면 부끄럽지만 자해공갈단 비슷한 것이었다. 가증스럽게 여차하면 병원행이었다. 평택대추리에서는 머리 조금 깨진 것을 가지고 죽겠다고 드러누워 병원으로 실려가며 연행을 피했다. 기륭전자에서는 갑자기 침탈해 온 공권력에 대항해 포클레인 붐대 끝으로 올라 눈을 감고 전깃줄 몇 가닥에 매달린 채 3시간여를 대치하며 죽겠다고 협박한 적도 있다.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수배 당시에는 내가 있는 곳이 꽤 높은 9층이고 나는 충분히 어떤 결단을 가질 수도 있는 정신없는 놈임을 경찰 라인 등에 흘리곤 했다. 세월호 진상규명을 외치며 보신각 사거리 방송차 위에 올라 경찰과 수시간을 대치하다가 끌려갔을 때는 연행 당시 갈비뼈에 살짝 금이 간 것을 대명천지에 고하는 것으로 구속을 면하기도 했다.
그런 자해공갈단으로 본의 아니게 살게 된 내가 네 번씩이나 입원하며 폐를 끼쳤던 곳이 녹색병원이었다. 두 번은 수술까지 받아야 했고, 두 번은 25일 단식과 47일 단식 후 실려갔다. 얼마 전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단식 와중에 실려가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졌지만 지난 20여년 한결같이 나처럼 절박한 이들이 끊이지 않던 사회적 야전병원이었다. 내가 입원하지 않더라도 연례행사처럼 해마다 몇 번씩은 문병을 가야 하던 병원이었다. 서울 목동 열병합발전소 75m 굴뚝 위에서 2년간 고공농성을 해야 했던 파인텍 해고노동자들이 실려간 곳도 녹색병원이었고, 94일 동안 단식했던 기륭전자 김소연과 유흥희 등이,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46일 동안 단식했던 기아차 비정규직 김수억이 실려간 곳도 녹색병원이었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36명의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세 번씩이나 단식을 해야 했던 쌍용차 김득중과 김정우가, 공장 철탑과 굴뚝 위로 올랐던 한상균과 문기주와 이창근이 매번 실려가던 곳도 녹색병원이었다.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서 죽겠다고 단식을 하던 유가족들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요구하며 국회에서 단식하던 청년비정규직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님이 실려간 곳도 모두 녹색병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해마다 수많은 현장에서 녹색병원으로 향하는 구급차를 보며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런 녹색병원이 올해 20주년을 맞아 ‘전태일의료센터’를 새롭게 만들겠다고 한다. 울컥하는 마음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은 공공병원이다. 1990년대 초반 경기 구리에 있던 원진레이온에서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사망자 8명에 장애판정자 637명이 발생했지만 정부와 노동부 등은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지금은 세계보건기구 국장으로 일하는 김록호 당시 사당의원 원장과 양길승 선생 등 진보적인 보건의료계와 노동·시민사회가 함께 싸워 진실을 밝히고 1993년 유가족과 피해자들이 함께 마음을 모아 설립한 공공의료병원이 현재의 녹색병원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의료 연대·지원 활동을 기본으로 하고 산하에 ‘노동환경건강연구소’와 ‘직업병·환경성질환센터’ 등을 두어 참된 건강사회를 만들기 위한 각종 연구·조사·대안 마련 활동을 해오고 있다.
그마저도 고맙고 귀한 일이었는데 이젠 ‘전태일의료센터’를 새롭게 세우겠다고 한다. 시민·노동자의 힘으로 함께 만들자고 한다. 나는 어떤 마음과 힘을 보탤 수 있을까. 그간 피눈물을 흘리며 녹색병원으로 실려가야 했던 수많은 노동자·민중들, 국가폭력·자본폭력의 피해자들이 먼저 나섰으면 좋겠다. 이 병원이 나의 병원이라고 소리쳐주면 좋겠다. 50여년 전 자신의 차비를 털어 어린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주고는 몇 시간을 걸어 집으로 가던 전태일의 마음을 기억하고 오늘 다시 연대를 실천하는 ‘전태일의료센터’ 건립이라는 눈물겹고 뜨거운 일을 함께 이루어보면 참 좋겠다.
송경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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