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호의 투자 프레임 <14>] 홍콩 ELS·상생금융이 드러낸 韓 금융의 규제 불확실성

윤지호 이베스트투자증권 리테일사업부 대표 2023. 12. 25.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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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호 이베스트투자증권 리테일사업부 대표전 이베스트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전 한화증권 투자분석 팀장, ‘주식의 시대, 투자의 자세’ 저자

자본주의는 실물과 금융의 양쪽 날개로 난다. 오른편 날개를 끄는 힘은 혁신이다. 더 싸고 더 효율적으로 물건을 만들고, 사고팔 때 실물경제는 성장한다. 왼편 날개의 원동력은 계약이다. 계약을 통해 돈이 필요한 곳에 흘러가야 경제는 활력을 얻는다. 기업은 주식 계약 또는 대출 계약을 통해 돈을 조달하여 혁신적인 상품을 내놓고, 개인은 소득의 일정 부분을 투자 상품에 넣어 미래를 대비해야 소비를 늘릴 수 있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계약을 통해 조달한 자금으로 원하는 것을 얻는다.

계약은 상호 신뢰에 바탕을 둔다.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줄 때, 금융기관은 이자를 받는 대신 돈을 떼일 위험을 동시에 지게 된다. 위험이 커지는 만큼 대출이자도 높아진다. 대출 계약은 위험의 크기만큼 대출자가 금리를 내고 돈을 빌린다. 대출이 아닌 금융상품도 마찬가지다. 투자수익이 높으면 그만큼 위험한 상품이고, 투자수익이 낮으면 금융기관이 망하지 않는 한 돈을 떼일 염려는 안 해도 된다. 자본주의는 혁신과 계약의 날갯짓으로 높이 날아오를 수 있다. 한쪽 날개가 힘을 잃으면 추락할 수밖에 없다. 왼편의 날갯짓이 흔들린다. 상호 불신이 초래한 위험이다.

홍콩 ELS 파장⋯투자자 책임은

홍콩 항셍중국기업지수(H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주가연계증권(ELS) 관련 논란이 뜨겁다. 내년 상반기에 만기가 도래하는 ELS에 투자한 투자자들이 조 단위에 달하는 대규모 손실을 인식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ELS는 중위험에 중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대표적인 금융자산으로 인식돼 왔다. 기초자산의 주가가 일정 범위 내에서 움직일 경우 약속된 조기상환 스케줄에 맞춰 연 5~7% 수준의 수익률을 확보할 수 있는 구조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ELS는 만기가 있고 변동성이 커질 경우 큰 손실을 볼 수밖에 없는 고위험 파생상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유럽 등 금융 선진국에서는 일반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ELS 같은 구조의 상품을 판매하지 않는다. 특정 기업의 주가나 주가지수가 어느 수준을 넘어서 하락할 경우 원금 손실(녹인·knock-in) 위험에 직면하게 되고, 최악의 경우 투자금 전부를 손해 볼 수 있다.

ELS는 발행 주체인 증권사뿐 아니라 은행에서도 다수 고객에게 판매됐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H지수 ELS의 총발행 잔액은 약 20조5000억원이며, 이 중 은행 판매분이 약 15조8000억원에 달한다. 은행 판매분 가운데 절반 수준인 약 8조4000억원이 내년 상반기에 만기가 도래할 예정인데, 현재 H지수 수준을 감안하면 최소 3조~4조원 규모의 손실 발생 가능성이 거론된다.

계약 형태가 어떠했는지를 두고 책임 공방도 벌어지고 있다. 은행 직원이 ELS를 판매하는 과정에서 손실 위험에 대한 고지를 하지 않았거나 일반 예금과 유사한 상품인 것처럼 포장해 가입을 권유했다면 이는 분명 불완전 판매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다 면밀히 살펴봐야 할 사안도 있다. ELS 투자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미 상품 가입 경험이 있는 재(再)투자자라는 점이다. 은행권에서는 재투자자의 비율이 90%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들은 그간 H지수가 손실 구간에 진입한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상품 구조와 위험성을 인지하고도 ELS에 가입한 것으로 보인다. 이럴 경우 절차적인 불완전 판매가 입증되지 않는다면 원칙적으로 판매사(은행)의 배상책임은 없다.

결국 금융 당국의 조사 결과가 나온 이후에나 최종적인 배상 여부 및 배상 비율이 결정될 것이다. 다만 과거 라임 사태, 옵티머스 펀드, DLF(파생결합펀드) 등 투자자의 손실과 금융권의 불완전 판매 이슈가 제기된 경우 예외 없이 금융회사들은 배상 책임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참고로 DLF 사태의 경우 기본 배상 비율이 55%로 결정된 바 있으며, 일부 고령층에 대해서는 최대 80%까지 적용됐다. ELS는 재투자자 비중이 높다는 점에서 과거 대비 배상 비율은 낮아질 것으로 예상되나, 은행권이 일정 부분 배상책임을 피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금융상품에 가입한 투자자들이 손실을 인식하는 경우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 안타까운 부분이다. 하지만 동시에 금융상품을 판매한 금융기관들 역시 고객이 입은 피해에 대한 손실보상, 감독 당국의 제재, 평판 저하 등으로 직간접적 비용 부담이 커지고 있다. 게다가 사태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로 ELS 판매가 원천적으로 차단됨에 따라 금융회사 입장에서는 추가적인 수익 기회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ELS 배상책임이 대규모로 결정될 경우 금융권 내 전반적인 금융상품 판매 위축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금융사고로부터 금융 소비자를 보호하는 조치는 분명 중요하다. 다만 투자상품에 대해 손실이 발생할 때마다 배상 조치가 이뤄지고 금융회사에 과도한 책임이 부여되는 것 또한 문제가 된다. 투자자들은 의사 결정 과정에서 자신의 위험 성향에 맞는 금융상품을 선택하고 구조를 명확하게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손실이 발생해도 이의를 제기하면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도덕적 해이가 확산할 경우, 금융회사들은 적절한 투자상품을 공급할 유인을 찾지 못하게 된다. 이는 궁극적으로 건전한 투자 문화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다.

금융 위축되면 혁신 동력 흔들려

ELS와 함께 최근 금융권의 화두가 되는 이슈로 ‘상생금융’을 꼽을 수 있다. 은행권의 상생금융 방안 주요 내용으로는 자영업자 및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한 저금리 대환대출, 중저신용자 대출 공급 확대, 고금리 차주 이자 환급 등의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보험업권에서는 금융 소비자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보험료를 인하할 가능성이 큰 상태다.

국민경제와 금융시장 내 공급된 자금을 바탕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금융기관의 특성상 일정 부분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금융권은 매년 기금 출연 등의 형태로 공공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고금리와 경기 부진 여파가 더해지면서 금융 당국의 요구 수준이 높아지고 있다. 상생금융 규모로 은행권은 2조원, 보험 업계는 1조원 수준이 거론되고 있다. 은행권의 경우 2조원은 올해 업계 전체 예상 순이익의 13% 규모로, 적지 않은 수준이다. 보험사들 역시 코로나19 국면 종식 이후 손해액이 점차 증가하고 있는데, 보험료 인하 압력이 커지면서 향후 실적 관리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ELS 사태와 상생금융의 전개 방향은 현재 국내 금융기관이 처한 현실의 단면을 보여준다. 주식시장에 상장돼 있는 민간 기업이지만 사회적 역할이 강조되고, 때로는 정치적 논리에서도 자유롭지 못한 공공기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금융주는 고금리 환경의 수혜주로 꼽히며 호실적을 바탕으로 고배당 가치주로 올해 시장의 주목을 받았으나 최근 성과는 기대만큼 좋지 못하다. 올해 10월 말 코스피가 2300포인트까지 하락한 이후 현재 2500포인트 부근까지 8%가량 상승한 반면, 은행주와 보험주의 수익률은 각각 +4%, -2%로 상대적으로 저조하다. 규제 이슈와 관련한 불확실성이 재차 부각된 영향이다.

한국은 이제 선진국이다. 실물경제 성장은 감속 구간에 들어섰다. 그나마 성장을 이끄는 동력은 금융일 수밖에 없다. 유럽과 일본에 비해 미국의 성장이 두드러지는 배경이다. 금융이 위축되면, 혁신의 동력마저 훼손돼, 실물은 더더욱 위축된다. 아쉽게도 한국은 금융의 상호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 SG증권발 주가 폭락 사태부터 최근의 공매도 금지 조치까지 시장 질서와 공정성, 투명성과 관련한 이슈들이 지속 제기돼 왔다. 금융기관의 잘못도 크지만, 그렇다고 정부가 민간 영역에 지나치게 개입해서도 안 된다. 자영업자나 ELS 투자자의 실패 원인 역시 스스로 선택한 결과라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실패할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는 정책은 자본주의를 병들게 한다. 책임 없는 선택은 계약의 신뢰도를 파괴한다. 의도가 선하다고, 결과가 그러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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