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한의 일본 탐구 <45> 150여 년 가전 명가 도시바 몰락의 교훈] 경영 자원 재분배 실패로 상장폐지…신사업 발굴이 회생 관건
20여 년 전 일본 근무를 시작할 때 도쿄 시내 가전 매장에서 고른 신제품이 38인치짜리 도시바(東芝) LCD 텔레비전이었다. 당시로는 거금인 약 40만엔(약 364만원)을 주고 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품질이 좋아 귀국할 때도 들고 들어와 10여 년을 더 썼다. 도시바는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잘나가는 전자 기업이었다. 소니, 히타치와 함께 일본 3대 가전 메이커로 꼽혔다. 냉장고, 세탁기, 청소기에서 일본 국산 1호 제품을 개발한 업체다. 한국과도 여러 가지로 인연이 깊다. 우리나라에서도 텔레비전, 컴퓨터 등이 큰 인기를 끌었다. 1992년 삼성전자에 플래시 메모리 제조 기술을 제공해 한국이 오늘날 세계 최고 반도체 국가로 성장하는 토대를 제공했다.
1875년 창업한 도시바가 12월 20일 상장폐지된다. 2015년 부정 회계 발각 이후 가전, 반도체, 휴대전화 등 적자 사업부 매각과 구조조정을 실시했으나 살아나지 못했다. 도쿄증권거래소에서 철수한 뒤 일본 토종 투자펀드인 산업혁신투자기구(JIC) 주도로 회생의 길을 찾게 됐다. 기업 공개 74년 만에 상장폐지되는 도시바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세계 최고 제조 기술을 보유했던 도시바의 몰락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11월 22일 마지막 주총, 상장폐지 결정
도시바는 11월 22일, 도쿄 신주쿠의 한 회의장에서 마지막 주주총회(주총)를 개최했다. 주주 123명이 출석했고, 9명이 경영진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들은 “상장폐지까지 가는 과정에 대한 회사 측 설명이 부족했다” “굉장히 아쉽다”며 도시바의 재건을 경영진에게 요구했다. 한 참석자는 울먹이며 “부정 회계 발각 이후 자금, 인재, 신용을 잃었다”며 “손실을 뒤로 미루는 눈속임이 현재 상황을 불러왔다”고 한탄했다.
부정 회계가 터지기 전인 2014년 주총의 출석 주주는 6396명에 달했다. 부정 회계 사건 다음 해부터 주총에 참석하는 수가 줄고, 경영진에 대한 원성이 커졌다. 이날 마지막 임시 주총에서 회사 측이 제출한 ‘비상장화를 위한 주식 병합’ 안건은 주주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가결됐다. 도시바는 상장폐지 후 JIC 산하 펀드 1사가 유일한 주주가 된다.
도시바, 150여 년의 흥망성쇠
도시바 창업자 다나카 히사시게(田中久重·1799~1881년)는 꼭두각시 인형 ‘유미히키도우지’ ‘만년 자명종’ 등을 만든 발명가다. 그는 도쿄 긴자에 기계 제조 공장을 열었으며, 제자이자 양자인 다나카 다이키치(2대 사장)가 도쿄 시바우라로 공장을 이전했다. 이 회사는 20세기 후반 텔레비전, 컴퓨터, 휴대전화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지금은 소비재 시장에서 대부분 철수했고, 전기 부품, 원자로, 중전기, 군사 기기, 철도 차량 등 중공업 제품군을 중심으로 기업 간 거래(B2B)에 주력하고 있다. 대형 중전 3사(히타치제작소·도시바·미쓰비시전기)의 일각으로 불린다. 2015년에 분식 결산에 따른 경영 부실이 발각된 후 주력 사업이던 백색 가전, 텔레비전, 컴퓨터, 의료 제품, 메모리 사업을 해외 기업에 넘겼다. 가전 명가답게 도시바의 역대 회장이나 주요 임원 가운데 재계에서 존재감을 보인 경영자가 많다. 이시자카 타이조(4대) 사장과 도코 토시오(6대) 사장이 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 회장, 오카무라 타다시(14대) 사장이 일본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냈다.
기존 수익 사업만 지키다 몰락
도시바가 자력 회생에 실패하고, 막다른 골목까지 몰린 원인은 무엇일까. 기업 전문가인 다마대학의 마카오 아키오 교수는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도시바의 몰락은 소중한 경영 자원(사람·물자·자본)을 경영진이 살리지 못한 결과”라며 “수익성만을 지나치게 중시한 결과 무리한 일이 쌓여 부정 회계까지 손을 댔다”고 지적했다. 경영 실패를 인정하지 못하고 무리하게 상장 유지에만 매달린 것도 문제로 꼽았다. 제삼자 배정 증자를 실시했고, 목소리가 큰 주주(대형 펀드)에게 계속 농락당하다가 결국 상장폐지까지 이르게 됐다고 분석했다.
경영학자들은 기업이 지속 성장하려면, 사회와 경제 변화를 민첩하게 판단해 고성장이 기대되는 분야에 경영 자원을 재분배해서 수익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영자들이 이해관계자인 주주, 종업원, 지역사회, 거래처 등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조율이 필요한 이유다. 하지만 도시바 경영진은 기업 환경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수준 높은 제조 기술, 인재, 풍부한 자금을 가지고도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진단이다. 도시바는 창업 이후 중전기와 가전 분야에서 눈길 끄는 신제품을 잇달아 선보였다. 대표적인 제품이 ‘노트북’이다. 이 회사는 1985년 유럽 시장에 ‘T1100’을 발표했다. 당시만 해도 데스크톱 컴퓨터가 주류였지만, 정보·통신 분야에서 데이터 처리 속도가 빨라지고, 모바일 디바이스 수요가 높아질 것으로 보고 선수를 친 것이다. 이 회사의 ‘다이너북’은 1994~2000년 노트북 시장에서 세계 최고 시장점유율을 기록했다. 도시바는 반도체 시장에서 세계 최초로 낸드(NAND)형 플래시 메모리 개발도 진행했다. NAND형 플래시 메모리는 스마트폰의 데이터 기억장치로 전 세계에 수요가 급격히 확대된 제품이다. 컴퓨터 기억장치로 이용되는 솔리드 스테이트 드라이브(SSD) 제품에도 상당한 공헌을 했다는 평가다.
업종 전환 머뭇거리다가 성장 기회 놓쳐
도시바는 디지털 시대의 도래를 일찍 예견했지만, 중전기 및 가전 분야에서 기존 체제를 고수했다. 경영진은 주력 업종의 전환 대신 노트북 등 기존 사업의 수익 확보에 매달렸다. 그러다가 2015년에 터진 부정 회계 사태가 회사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기업 이미지가 곤두박질했고, 고객 이탈이 가속화됐다. 2006년 약 6000억엔(약 5조4600억원)에 매수한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대형 손실이 또 다른 악재가 됐다. 결국 회사는 채무 초과 상태로 빠져들었다. 도시바는 부정 회계나 웨스팅하우스의 1조4000억엔(약 12조7400억원) 손실 발생 직후 경영 실패를 인정할 기회가 있었다. 종합 전기 메이커로서 비즈니스 모델(BM) 한계를 수용하고, 사회 인프라 사업이나 반도체, 의료, 양자 컴퓨팅 등 성장성이 높은 분야에 경영 자원을 재분배해야 했다. 그럼에도 도시바는 사업 구조 혁신 대신 상장 유지에 매달렸다. 2017년에 제삼자 배정 증자를 실시하고, 해외 펀드 등에서 6000억엔을 조달했다. 공모가 아닌 제삼자 배정을 한 것은 투자자들이 회사의 장래를 불안하게 봤기 때문이다. 제삼자 배정 증자로 상장은 유지했으나 경영 혼란이 더 심해졌다. 의료 기기나 반도체 사업 매각으로 수입이 계속 감소했고, 구조 조정으로 조직과 인력이 축소됐다. 출자에 참여한 주주들은 눈앞의 이익에 매달려 가치 환원(자사주 매입이나 배당 증가)을 요구했다. 자사주 매입으로 가뜩이나 어려운 경영 여건이 더 나빠졌다. 분사화 등 구조 개혁이 늦어지며 막다른 길로 몰리게 된 것이다.
도시바 회생, 신수익 사업 확보에 달려
도시바는 JIC의 주도 아래 회생에 나선다. 상장폐지로 불특정 다수 주주의 눈치를 보는 일이 없어지고, 경영진은 사업 개선 속도를 높일 수 있게 됐다. 비상장의 이점을 활용해 안정적으로 수익을 획득할 수 있는 사업 구조로 전환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기존 사업 가운데 에너지, 인프라 사업 등의 수익성은 양호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런 사업은 사업 운영 효율성을 더 높이고, 수익률을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신규 수익 사업을 발굴하는 것이다. 마카오 교수는 “인공지능(AI), 탈탄소, 반도체 등 미래 성장성이 높은 부문에 경영 자원을 재분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른 시일 내 회생 방향을 찾지 못할 경우 JIP와 도시바 경영진 간 불협화음이 생겨 다시 혼돈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JIP는 3~5년 이후 도시바를 재상장시킬 계획이다. 도시바는 눈앞의 이익만 보고 기존 사업에서 수익 확대를 과도하게 추구한 결과, 실적이 악화하고 성장 잠재력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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