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광훈의 산인만필(散人漫筆)<33>] “귀뚜라미 방안에 들어오자 한 해가 저물려 하네”
당(唐)의 전성기인 700년 전후의 수십 년 동안을 성당(盛唐)이라 부른다. 이때의 맹호연(孟浩然·689~740)은 대표적인 전원(田園)시인의 한 사람으로 이름이 높다. 같은 시기의 왕유(王維)와 병칭되며 동진(東晉)의 도연명(陶淵明)과도 비견된다. 그 대표작 ‘춘효(春曉)’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봄잠으로 날 밝음도 깨닫지 못했더니, 곳곳에서 새 울음 들려온다. 간밤에 비바람 소리 났는데, 꽃이 얼마나 떨어졌을까(春眠不覺曉, 處處聞啼鳥. 夜來風雨聲, 花落知多少)?”
그는 열두 살 아래의 이백(李白)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이백이 그가 살던 양양(襄陽) 부근에 와서 눌러앉아 몇 년을 지내는 동안 의기투합해 망년지교(忘年之交)가 된 것이다. 배를 타고 양주로 가는 그를 전송한 뒤 이백이 쓴 ‘황학루송맹호연지광릉(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황학루에서 광릉으로 가는 맹호연을 보냄)’은 명작으로 꼽힌다. “오랜 벗이 서쪽으로 황학루를 이별하고, 안개 속 꽃 피는 삼월에 양주로 내려가네. 외로운 돛 먼 그림자 푸른 허공에서 사라지자, 하늘가를 흐르는 장강만 보이는구나(故人西辭黃鶴樓, 煙花三月下揚州. 孤帆遠影碧空盡, 唯見長江天際流).” ‘광릉’은 양주의 옛 이름이다.
이백은 맹호연에게 여러 번 시를 써 보냈다. 그중에서 ‘증맹호연(贈孟浩然)’이란 오언율시가 이백의 눈에 비친 그 삶과 사람됨을 잘 표현하고 있다. “나는 맹 선생을 좋아하오니, 멋진 풍류로 천하에 알려졌다오. 얼굴 붉던 젊은 시절 벼슬 마다하다가, 머리 희어진 지금 구름 낀 소나무 아래에 누웠소. 달에 취해 자주 술 들이켜고, 꽃에 홀려 군주를 섬기지 않았지요. 높은 산 어찌 우러러볼 수 있을까만, 그저 이렇게 맑은 향기에 옷깃을 여민다오(吾愛孟夫子, 風流天下聞. 紅顏棄軒冕, 白首臥松雲. 醉月頻中聖, 迷花不事君. 高山安可仰, 徒此揖淸芬).”
초야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전형적인 은사(隱士)의 지조 높은 모습을 기리고 있다. 그러나 맹호연의 일생을 살펴보면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 그는 거의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려는 염원을 가지고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해 할 수 없이 전원에서 생활한 사람이다. 그가 남긴 200여 수의 시에서 그러한 마음을 담은 작품이 수십 편에 이른다. 이런 면은 이백과 대단히 유사하다. ‘세모귀남산(歲暮歸南山·세모에 남산으로 돌아가서)’이라는 다음 작품에서 그는 벼슬을 얻지 못한 아쉬움과 허전함을 여실히 고백하고 있다.
“북쪽 궁궐에 글 올리기를 그만두고, 남쪽 산의 낡은 초가로 돌아왔노라. 재주 없어 영명한 군주가 버리는 데다, 병 많아 벗들마저 멀리하누나. 흰 머리카락이 늙음 재촉함에, 푸른 봄기운은 한 해를 밀어내 저물게 하도다. 마음속 긴 시름으로 잠 못 이루니, 소나무에 걸린 달이 텅 빈 밤의 창을 비춘다(北闕休上書, 南山歸敝廬. 不才明主棄, 多病故人疏. 白髮催年老, 靑陽逼歲除. 永懷愁不寐, 松月夜窗虛).”
오랜 시절 여러 차례 과거에 낙방하고, 유력 인사들에게도 조정에 추천해줄 것을 부탁했으나 번번이 실패한 그는 낙담 끝에 고향으로 돌아가 이 시를 지었다. 더구나 한 해가 저물어가는 처량한 때 그런 참담한 모습으로 귀향했으니 그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중당(中唐) 때의 백거이(白居易·772~846)는 제목에 ‘세모’가 들어간 시가를 20편 가까이 남겼다. 그중에서 ‘세모(歲暮)’라는 작품이 특히 눈길을 끈다.
“막바지 절기 급한 햇볕에 앉은 채로 쫓기니, 힘찬 시절 고운 얼굴은 가서 오지 않는구나. 옛 병이 나이 들어 거듭 생겨나고, 새 근심은 언제나 밤에 많이 몰려오도다. 기름이 스스로를 밝게 태움은 일이 많아서이고, 기러기가 소리 못 내 먼저 삶아짐은 재주 없는 까닭이라. 화와 복은 자세히 찾아봐도 마주할 곳 없으니, 그저 손안의 잔이나 들이킴만 못하도다(窮陰急景坐相催, 壯齒韶顏去不回. 舊病重因年老發, 新愁多是夜長來. 膏明自爇緣多事, 雁默先烹爲不才. 禍福細尋無會處, 不如且進手中杯).”
한 해가 다해가는 시점에서 지난날의 삶을 돌이켜보며 헛되이 나이만 들어가는 스스로의 신세를 한탄하는 장면이다. ‘고명(膏明)’과 ‘안묵(雁默)’에는 고사가 있다. ‘한서(漢書)’의 ‘공승(龔勝)열전’에 “훈이향자소, 고이명자소(薰以香自燒, 膏以明自銷)”라는 말이 나온다. “향긋한 풀은 향기 때문에 스스로 태워지고, 기름은 밝음으로써 스스로 녹다”는 뜻이다. 학문과 경륜이 남달랐던 공승이 결국 이로 인해 천수를 누리지 못했음을 그 지인이 안타까워서 했던 말이다. 이에 앞서 ‘장자(莊子)’에 “산목자구, 고화자전(山木自寇, 膏火自煎)”이란 구절이 보인다. “산의 나무는 스스로를 해치고, 기름불은 스스로를 지진다”라는 뜻이다. 또 같은 책에 잘 우는 기러기와 못 우는 기러기 중에서 못 우는 것을 잡아서 삶는다는 우화가 실려 있다. 시인은 이 두 전고(典故)로 재능이 부족한 자신이 공연히 벼슬살이에서 여러 일에 관여해 화를 불렀다고 자책하고 있다.
삼국시대 위(魏)나라 말기의 완적(阮籍)은 ‘영회시(詠懷詩)’ 82수 중 제3 수의 마지막에서 세모의 감상을 이렇게 적었다. “내 몸조차 스스로 보전치 못하는데, 하물며 처자를 돌보겠는가. 엉겨 붙은 서리 들풀 덮으니, 한 해가 저물어 또 끝나려 하는구나(一身不自保, 何況戀妻子. 凝霜被野草, 歲暮亦云已).” 사마의(司馬懿)와 그 두 아들이 차례로 권력을 잡고 발호(跋扈)하던 공포적인 정치 상황 속에서 한 해를 보내며 지식인의 고뇌를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두보(杜甫)의 작품 중에도 ‘세모(歲暮)’라는 오언율시가 있다. “세모에 멀리 나그네 되어(歲暮遠爲客)”로 시작되는 이 시에서 시인은 ‘안사지란(安史之亂)’의 막바지에 또 한 해를 보내며 아직도 난이 평정되지 않았음을 슬퍼한다.
통상적으로 ‘세모’는 한 해의 끄트머리를 가리키지만 인생의 노년을 뜻하기도 한다. 서진(西晉)의 저명 시인 좌사(左思)가 ‘잡시(雜詩)’에서 “힘찬 나이에 언제나 머물지 못하니, 세월이 저물어 가면 늘 한탄한다(壯齒不恆居, 歲暮常慨慷)”라고 한 것이 그 예다.
이 말은 ‘시경’에서 비롯됐다. ‘실솔(蟋蟀)’ 편에 “귀뚜라미 방안에 들어오자 한 해가 저물려 하네. 지금 내가 즐기지 않으면 날과 달이 사라지리니(蟋蟀在堂, 歲聿其莫. 今我不樂, 日月其除)”라는 부분이 있다. ‘세율(歲聿)’의 ‘聿’은 ‘필(筆)’의 원형으로서 붓을 가리키는 글자이지만, 여기서는 어감을 조절하는 허사로 쓰였다. ‘莫’은 후대에 ‘막’으로 읽히며 허사로 사용되나 당초에는 ‘暮’의 원형이었다. 또 ‘소명(小明)’ 편에도 이와 유사한 ‘세율운모(歲聿云莫)’라는 구절이 보인다.
일 년의 마지막 날은 ‘제일(除日)’이라 한다. ‘한 해가 없어지다’는 뜻의 ‘세제(歲除)’에서 나온 말이다. ‘除’는 위의 ‘시경’ 작품에도 있다. ‘세제’는 맹호연의 시에 보이며, 송대 시인 왕안석(王安石)의 ‘원일(元日)’에도 “폭죽 소리 속에서 한 해가 없어졌다(爆竹聲中一歲除)”고 쓰였다.
새해를 맞을 마지막 날 밤을 ‘세제야(歲除夜)’ 또는 ‘제야(除夜)’로 불렀다.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이 ‘제야’라는 시를 지은 적이 있고, 그보다 한 세대 뒤에 두보의 할아버지 두심언(杜審言)은 ‘제야유회(除夜有懷)’라는 작품을 남겼다.
‘제야’라는 명칭은 오늘날 한국과 일본에서 주로 쓰이고, 정작 중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제석(除夕)’이라고 한다. 일본어로는 ‘죠야(じょや)’고 중국어로는 ‘추시’다.
일본에서는 섣달그믐을 ‘오미소카(おおみそか)’라 한다. 한자로는 ‘대회일(大晦日)’이라고 쓴다. 일 년 중에 가장 큰 그믐날이라는 뜻이다. ‘미소카(みそか)’는 ‘삼십일(三十日)’이다. ‘미소’의 ‘미’는 3이고 ‘소’는 고어로 10을 가리킨다. 일본의 전통 시가인 ‘와카(和歌)’는 모두 31자로 이루어져 ‘미소히토모지(三十一文字)’로 불리기도 한다. 태평양전쟁 때의 해군 대장 ‘야마모토 이소로쿠(やまもと いそろく·山本五十六)’나 저명 시인 ‘사이죠 야소(さいじょう やそ·西條八十)’의 ‘소’도 모두 이와 같다.
한 해를 보내면서 대다수의 사람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잘 이루어진 사람도 더 큰 욕심을 채우지 못해 아쉬워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지난 일은 돌이킬 수 없다. 흘러간 한 해는 미련 없이 보내버리고 다시 한번 희망찬 새해를 맞이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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