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착륙 비행·GPU푸어·시체졸업사진 … 2023 세계의 키워드
매년 12월이면 세계 유수 기관에서 '올해의 단어'를 발표한다. 2023년을 대표하는 단어로 '환각을 느끼다(hallucinate)' '리즈(rizz·이성을 끌어당기는 매력)' 등이 꼽힌 가운데 매일경제 특파원들이 취재 현장에서 포착한 트렌드를 올해의 키워드로 정리했다.
올해 미국 경제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무착륙 비행(FWL·Flight Without Landing)'이다. 1년 전 대다수 경제 전문가가 올해 미국 경기 침체를 전망했지만 미국 경제가 오히려 예상보다 높은 성장세를 보인 데 착안한 단어다. 일각에서는 경기 침체가 내년으로 연기됐다는 주장도 나오지만 올해 미국 경제가 견조했던 것은 분명하다.
골드만삭스가 이름뿐인 경기 침체를 뜻하는 '리노(RINO·Recession In Name Only)'를 만들어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증시가 올해 예상외로 강세를 보이자 이를 '리노 랠리'라고 불렀다. 지난 22일(현지시간)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는 연초 대비 23% 오르며 역대 최고점에 근접했다.
미국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전 분기 대비 연율 기준 2.2%(1분기), 2.1%(2분기), 4.9%(3분기) 등으로 선방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직전 해인 2019년 성장률 2.2%(1분기), 3.4%(2분기), 4.6%(3분기) 등과 비슷하다. 미국 경제를 떠받친 것은 무엇보다 강력한 개인소비였다. 고금리·고물가가 지속됐지만 상품과 서비스 모두 소비가 늘어났다. 개인소비 상승률은 전 분기 대비 연율 기준 3.8%(1분기), 0.8%(2분기), 3.6%(3분기) 등으로 같은 기간 산업생산 증감률(각각 -0.3%, 0.8% 2.0%)을 크게 넘어섰다.
뜨거운 고용 시장도 경제를 끌어올렸다. 올해 실업률은 3%대 중후반을 기록해 완전고용에 가까웠다. 시간당 임금 상승률은 4%대를 유지하며 팬데믹 이전(2~3%)보다 여전히 높았다.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는 무엇일까? '인공지능(AI)'이나 '챗GPT'처럼 이제는 일상화된 용어가 아니라 'GPU 푸어'다. 반도체 분석 기관 세미애널리시스가 언급하면서 널리 퍼진 이 단어는 2023년 AI 열풍의 단면을 보여준다.
GPU는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에서 만드는 병렬연산에 최적화된 반도체다. 컴퓨터에서 고해상도 그래픽 처리, 비트코인 채굴 등에 쓰이지만 최근에는 AI 학습과 추론(학습한 AI를 서비스에 사용하는 것)에 많이 사용된다. 챗GPT가 큰 화제를 모으면서 AI를 학습시키고 이를 서비스하려는 수요가 폭발했다. 당연히 엔비디아가 생산하는 GPU에 주문이 몰려들었고, GPU를 확보하지 못한 기업은 스스로를 자조적으로 'GPU 푸어'라고 불렀다. GPU를 충분히 확보한 기업은 'GPU 리치'로 불렸다.
GPU를 많이 보유한 회사는 다른 업체보다 빠르게 학습해 좋은 AI를 만들 뿐만 아니라 이를 가지고 좋은 인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직접 AI 반도체를 생산하고 데이터센터를 운영하는 구글이나 대규모 투자를 받은 오픈AI 같은 스타트업이 GPU 리치였다. 하지만 GPU 푸어 기업은 AI를 개발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GPU 수요 폭증으로 엔비디아 주가는 올해 들어 242%나 뛰어올랐다. 엔비디아의 AI용 GPU 실적이 반영되는 데이터센터 매출은 지난 3분기 145억1000만달러를 기록해 전년 같은 기간보다 279% 늘었다. AMD부터 마이크로소프트(MS), 아마존까지 많은 기업이 엔비디아 GPU를 대체할 수 있는 AI 반도체를 내놓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중국은 올해 엄격한 제로 코로나 정책을 폐지하고 리오프닝(경제활동 재개)에 나섰다. 하지만 경제 회복 속도는 당초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내수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데다 부동산 침체, 지방정부 부채 위기 등이 겹치면서 중국 경제가 의미 있는 반등을 이뤄내지 못한 것이다.
경제 부진의 직격탄을 맞은 건 중국 청년이었다. 중국 대학 졸업 시즌인 올해 6월 중국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가장 뜨겁게 달군 것은 이른바 '사망졸업사진'이었다.
"살아 있어도 산 게 아니다"라는 설명과 함께 학생들이 졸업 가운을 입은 채 얼굴을 땅에 늘어뜨리거나 난간·간판·의자 등에 시체처럼 매달려 있는 모습 등이 담긴 졸업사진이 유행처럼 번졌다. 졸업식이 곧 장례식이라는 졸업생들의 탄식이었다.
일명 '시체샷·좀비샷'으로 불리는 해당 사진은 중국의 취업난을 대변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CNN은 "재학 내내 제로 코로나에 시달리던 대학생이 이제는 '제로 직장'이라는 취업난을 겪으며 느끼는 비애를 사진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전했다.
중국 국가통계국에 따르면 지난 6월 기준 중국 16~24세 청년 실업률은 21.3%로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 중국 당국은 사회 불안 등을 우려해 올해 7월 이후 청년 실업률 발표를 전격 중단했다. 팬데믹 때에도 중국 청년은 '탕핑' '바이란' 같은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자신들의 처지를 자조했다. 탕핑은 똑바로 드러누워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몸과 마음이 지쳐 버리면서 아예 더는 노력하지 않는 태도를 말하며, 바이란은 완전히 자포자기한 상태를 의미한다.
올해는 일본이 주요 7개국(G7) 의장국을 맡으며 대외적으로 국력을 과시하고, 2011년 대지진 이후 최대 문제였던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의 오염수를 방출하면서 묵혀둔 현안을 처리한 해로도 기록된다. 일본 야구팬이 가장 사랑하는 선수인 오타니 쇼헤이의 대형 미국프로야구(MLB) 계약과 38년 만의 한신 타이거스 우승 또한 열도 전반을 아우르는 이슈로 꼽힌다.
이러한 들뜬 사회 분위기는 연말에 등장한 '깃쿠밧쿠(キックバック)' 단어가 이를 모두 빨아들이는 진공청소기 역할을 했다. 영어로 정치적 뇌물을 뜻하는 '킥백(Kickback)'의 일본식 발음 깃쿠밧쿠는 일본 정치체제를 후진시키고 정부 지지율을 떨어뜨리는 악재가 됐다.
일본 집권 여당 자민당은 여러 파벌로 구성돼 있다. 이 가운데 최대 파벌로는 고 아베 신조 총리가 이끌었던 아베파(세이와 정책연구회)가 꼽히는데, 이들이 정치자금 모금을 위한 파티를 주최한 뒤 여기서 거둔 이익의 일부를 소속 의원들에게 돌려준 것이 문제가 됐다.
이러한 아베파가 소속 의원들에게 돌려준 돈은 회계 처리가 되지 않았고, 결국 의원들의 비자금으로 쓰였을 것이라는 게 일본 국민의 시각이다.
가뜩이나 최근 2~3년 새 물가가 꾸준히 올라 기시다 후미오 내각을 향한 국민 시선이 곱지 않은데 이 사건이 큰 도화선이 돼 현재 내각 지지율은 역대 최저인 10%대로 떨어졌다. 정치 비자금 문제가 심각해지자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아베파 소속 장관급 인사 4명과 차관급 인사 5명을 전원 경질하고, 자민당에서 핵심 역할을 맡은 아베파 인사도 교체했지만 역부족이다.
여기에 도쿄지검 특수부가 조사를 시작하면서 깃쿠밧쿠 사건이 기시다 내각을 무너뜨리는 촉매제가 될 것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뉴욕 윤원섭 특파원 / 실리콘밸리 이덕주 특파원 / 베이징 손일선 특파원 / 도쿄 이승훈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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