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가 노숙자 피고인에게 소설책·현금 10만원을 건넨 이유는…
부산의 한 판사가 특수협박 혐의로 구속돼 재판에 넘겨진 50대 노숙자 피고인에게 선고 직후 위로와 현금, 책을 건넸다.
50대 중반인 이 판사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철저히 고립돼 나름 성실히 살던 ‘사회적 무명자’(無名者)들이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법정에 섰을 때 형벌과 함께 사회적 관심과 배려도 함께 전해져야 한다”고 했다.
25일 부산지역 법조계에 따르면 부산지법 동부지원 형사1단독 박주영 부장판사는 지난 20일 특수협박 혐의로 구속기소된 50대 A 씨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보호관찰 2년을 명령했다. 박 부장판사는 이 사건 선고 직후 “나가서 상황을 잘 수습하고 어머니 산소에 꼭 가봐라”고 당부하며 책 1권을 건넸다.
책은 중국 작가 ‘위화’의 소설 ‘인생’이었다. 이 책은 국공내전, 문화대혁명 등 중국의 격동기를 지나며 살아 남은 민초 ‘푸구이’의 파란만장한 밑바닥 삶을 그린 소설이다. 장이머우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1994년 칸느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책 사이엔 현금 10만원이 든 봉투가 들어있었다.
박 부장판사는 “A씨가 고물을 주우러 다니면서 가끔 도서관을 들러 책을 읽는 걸 좋아하고 소설도 좋아한다고 해 책을 선물했다”며 “30대 초반에 고향을 떠나 가족, 세상과 단절되어 사는 분이라 인생의 의미, 가족의 소중함을 책으로라도 느꼈으면 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장 갈 곳도 없고 돈도 없을 것 같아 돈을 책에 끼워줬다”고 했다.
A 씨는 지난 9월 28일 오전 1시쯤 부산 수영구 한 편의점 앞에서 노숙인 동료 B 씨와 함께 술을 마시다 말다툼을 하게 되자 손수레에 보관하던 칼을 꺼내 B씨를 위협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박 부장판사는 판결문을 통해 “술에 취해 칼을 들고 B씨를 위협한 정황이 상당히 위험하기는 하나 A씨가 범행을 인정하고 있고 범죄 전력이 없으며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 점, 그 밖의 기록 등을 종합해 양형을 정했다”고 말했다.
박 부장판사는 통상 피고인이 구속되면 가족이나 지인이 재판부에 탄원서가 들어오는데 A 씨는 그런 것이 없자 A씨의 살아온 행적에 대해 판결 전 조사를 했다. 이 조사에 따르면 경남 출신인 A 씨는 부모 별세 후 30대 초반 부산으로 넘어와 27년 동안 부산 전역을 돌며 폐지나 고철 등을 수집하거나 노숙생활을 해왔다. 휴대전화도 없고, 주민등록이 말소된 상태였다. 연락하는 가족도 단 1명이 없었다.
박 부장판사는 보호관찰 대상자의 준수사항을 A씨에게 전달했다. 이 준수사항은 주거지에 상주하고 생업에 종사할 것, 범죄로 이어지기 쉬운 나쁜 습관을 버리고 선행을 하며 범죄를 행할 우려가 있는 사람들과 교제하거나 어울리지 말 것 등을 내용으로 했다.
‘주거지에 상주하고 생업에 종사할 것’을 보호관찰 준수사항 맨 앞에 둔 것은 A씨가 주민등록을 살려 사회 시스템 안으로 들어오게 하려는 의도가 담겼다. 또 특별 준수사항으로 ‘일정량 이상의 음주를 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박 부장판사는 “평소 사회의 주류적 프레임에서 완전히 벗어나 아무런 존재감이 없는 이런 분들이 범죄라는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사회적 시선에 포착돼 법정에 선 순간, 형벌과 함께 사회적 관심과 배려가 함께 전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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