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서점가 장악한 '세이노 신드롬'..."출판이 이토록 가벼워도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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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의 책은 '세이노의 가르침'이었다.
'세이노의 가르침'이 인기를 견인한 덕분에 올해의 베스트셀러 목록 상위권에 자기계발서가 대거 포진하며 인문교양·문학 장르의 책을 밀어냈다.
'세이노의 가르침'은 저자가 20년 전에 발표한 신문 칼럼과 에세이를 엮은 책으로, 일부 내용과 표현이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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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만능키'...특정인 모방 욕망 키워
공동체 사유 얕아지고 출판 생태계 훼손
팬덤 독서 벗어날 참신한 기획 필요
2023년의 책은 '세이노의 가르침'이었다. 75만 권이 넘게 팔리며 대형서점들이 발표한 올해 베스트셀러 1위를 석권했다. '세이노의 가르침'이 인기를 견인한 덕분에 올해의 베스트셀러 목록 상위권에 자기계발서가 대거 포진하며 인문교양·문학 장르의 책을 밀어냈다. 출판계의 표정은 어둡다. 자기계발서 쏠림 현상이 출판 생태계 측면에서 출판계나 독자 모두에게 독이 된다는 우려가 안팎에서 나오는 까닭이다.
불확실성이 부른 초베스트셀러 기록
정체불명의 저자가 쓴 '세이노의 가르침'은 '부자 되기'가 지상과제가 된 불확실성의 시대를 만나 괴력을 발휘했다. '세이노(Say no·'아니다'라고 말하라)'라는 필명을 쓰는 저자는 밑바닥부터 시작해 1,000억 원대 순자산을 보유했다고 밝힌 자수성가형 인물. 그는 책에서 투자, 시간관리, 처세, 독서법 등 매운맛 인생명언을 736쪽에 걸쳐 쏟아낸다. 세계 경제 장기 불황, 국내 주식·부동산 시장의 요동,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두 개의 전쟁 등 불확실성이 극대화된 시대에 부를 축적하려는 독자들에게 흙수저 출신 부자를 자처하는 저자의 생존술이 일종의 만능열쇠처럼 받아들여졌다는 분석이 많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저자가 천억 원대 자산가라는 점을 마케팅 소구점으로 내세우면서 경제적 생존 압박이 심한 청년들에게 책이 단순한 재테크 비법을 넘어 삶의 지혜로 받아들여진 것"이라며 "자신만의 기준과 성취를 위한 성찰보다는 '무조건 부자 되기'가 유일한 삶의 목표가 된 우리 시대의 씁쓸한 풍경"이라고 설명했다.
'팬덤' 기반 자기계발서 범람... 출판 질 하락 우려
'세이노 현상'을 보는 출판계의 우려는 여러 갈래다. 격변의 시기에 더 다양한 책이 나와야 함에도 한 가지 주제에 편중된 이른바 '팔리는 책'으로 몰려가는 출판계 악습을 심화시켰다는 것. 한미화 출판평론가는 "비즈니스 측면에서 (출판계가) 자기계발서 열풍을 어느 정도는 따라갈 수 있겠지만 최소한의 균형은 맞춰야 한다"며 "출판이 독자가 가치 판단을 할 수 있는 다양한 세계를 제공해야 하는데 한국의 베스트셀러 시장은 쏠림 현상이 심하다 못해 다른 장르를 죽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지적했다.
자기계발서를 표방하지만 재테크서에 가깝거나 주관적 경험만 강조하는 등 빈약한 내용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서점가를 장악한 '역행자', '사장학개론' 등 실제 돈을 번 부자들의 이야기가 실증할 만한 이론이나 체계 없는 주장만으로 채워졌다는 것이 비판의 골자이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위기를 헤쳐나가는 방법으로 무조건 개인의 노력만을 주장하는 책들이 쏟아지는데, 그럴수록 '책 속에 길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책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온다"며 "사회에 대한 심도 있는 사유나 지식을 담은 양서가 소외되면 결국 공동체의 사유도 얕아질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위기 돌파할 사유 어디에...출판 기획력 부족 지적도
일각에선 올해 두드러진 자기계발서 편중 현상이 출판업계의 기획력이 한계를 노출한 것이라고 진단한다. 독자를 설득할 수 있는 새로운 화두를 제시하지 못한 채 유튜버나 인플루언서 저자를 앞세운 책에 골몰하는 최근 출판 경향과도 무관치 않다. '세이노의 가르침'은 저자가 20년 전에 발표한 신문 칼럼과 에세이를 엮은 책으로, 일부 내용과 표현이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지난해에 이어 2년 가까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른 '역행자'도 사회문화적 환경에 무비판적인 개인 수련만을 강조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장은수 출판평론가는 "올해 무(無)시간적인 자기계발서가 유행한 가장 큰 요인은 시대정신을 담은 양질의 콘텐츠가 공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출판업계가 보다 치밀한 기획력으로 시대를 관통하는 문제의식과 개인의 삶의 길을 동시에 보여줘야 하는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손효숙 기자 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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