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 칼바람’ 지나간 자리, 엄마와 아기가 남았다···베이비박스는 지금
강유연씨(가명·26)는 지난여름 배 속에 아이가 생겼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아이는 벌써 7개월 차라고 산부인과 의사는 말했다. 아이의 아버지인 전 남자친구와는 이미 헤어진 뒤였다. 강씨는 당시를 “인생의 암흑기였다”고 했다. 부산에서 서울로 발령이 나, 상경해 다니던 회사에서 그는 얼마 전 구조조정을 당한 터였다. 강씨는 아이와 둘만 존재했던 두 달여 동안 “두려웠고, 무기력했고, 안 좋은 생각도 많이 했다”고 했다.
강씨는 아이를 혼자 잘 키울 자신이 도저히 없었다. 비혼모 센터를 찾아보다가도 가족관계증명서 등 준비해야 하는 서류 등 복잡한 일들이 참 많다고 느꼈다. 아이를 입양 보낼 방법을 알아보다 보면 ‘친부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조건에서부터 가로막혔다. 그때 강씨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몇 년 전 영상에서 봤던 ‘베이비박스’였다. 사정이 여의치 않은 부모가 아이를 두고 갈 수 있는 곳이라는 베이비박스는 그에게 마지막 동아줄 같았다.
그런데 강씨가 출산 이후를 고민하던 지난 7~8월은 감사원 의뢰로 출생미신고 아동에 대한 지방자치단체·수사기관 등의 전수조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던 때였다. 베이비박스를 검색하면 연관검색어로 ‘처벌’이 뜨는 상황에 강씨는 마음이 위축됐다고 했다. 숙고하던 그는 8월초 베이비박스가 있는 서울 관악구 주사랑공동체교회에 연락했다. 아이가 9개월 차로 막달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수사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가 지금보다는 입양처에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전화를 걸었어요.” 강씨가 말했다. 그는 주사랑공동체교회 측의 조력으로 병원에서 안전하게 출산하고, 여러 상담 끝에 아이를 본인이 키우기로 했다. 그는 “절대 못 키우겠다고 했었는데, 주사랑공동체교회에서 나라에서 지원받을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알려줬다”며 “기댈 구석이 생기고 상황이 안정되니 아이가 보이더라”고 했다.
지난 6월 수원에서 발생한 ‘냉장고 영아 시신 유기’ 사건을 계기로 출생미신고 아동에 대한 지자체 전수조사와 경찰 수사가 이뤄진 지 반년이 흘렀다.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두고 온 산모들에 대해선 상담 등 절차를 밟지 않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무혐의로 사건이 종결됐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수사로 인한 위축 효과가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다. 전수조사가 시작된 지난 7월부터 이달 24일까지 베이비박스를 통해 보호받은 영아는 총 25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51명의 절반 미만에 그쳤다. 실제 경향신문이 지난 21일 찾은 주사랑공동체교회의 베이비룸에는 아이가 2명밖에 없었다. 이곳에는 아이가 최대 10명까지 들어갈 수 있다.
베이비박스 관계자들은 “한 달에 10명 이상 들어오던 아이들이 이젠 한 달에 1~2명꼴로 들어온다”며 “처벌받을까 하는 불안감에 위기 임산부들이 좋지 않은 환경으로 내몰리는 게 아닌지 걱정된다”고 했다. 위기 임산부와 영아들이 안전할 수 있는 사회적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14년째 베이비박스를 운영 중인 이종락 주사랑공동체교회 목사는 전수조사가 시작된 이후 ‘처벌받는 것 아니냐’는 전화를 수도 없이 받았다고 했다. 이전에 아이를 맡기고 간 여성들 가운데 수사로 인한 불안감으로 우울증약을 처방받은 이들도 다수 있다고 했다. 이 목사는 “엄마들이 여기까지 오는 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며 “아이들뿐 아니라 그 어머니들 또한 지켜져야 하지 않겠나”라고 했다.
일각에서는 베이비박스가 유기를 조장한다는 비판도 제기한다. 하지만 이 목사는 “다른 데 버리면 아이는 죽는다. 영하로 떨어지는 겨울에 아이가 밖에 있으면 어떻게 되겠나”라며 “이곳은 아이를 안전하게 가져다 두는 최후의 보루”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수사로 인한 위축으로 또다시 밖에서 살해되는 아이가 생길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하다”고 했다.
실제 베이비박스의 문을 두드리는 어머니들은 끝의 끝까지 대안을 고민하다가 찾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임예슬씨(가명·27)도 지난 8월 출산일을 이틀 앞두고 급하게 주사랑공동체교회에 연락을 했다. 베이비박스 측은 그의 보호자가 되었다. 임씨는 아이를 기를 의사가 있지만, 가족의 반대로 일단 아이를 보육 시설에 맡겨두고 있는 상황이다. 이때도 베이비박스 측이 그 과정을 안내했다.
임씨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여성들이 더 위험한 곳으로 숨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데도 오지 않는 분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왜 오지 않는지 알 것 같다”며 “그래도 혼자 고민하는 것과 상담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은 다르더라”고 했다.
비혼모가 된 그는 영아유기 전수조사에 대해 “아이들이 잘 살아있는지 확인하는 조사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결국 대부분 책임을 엄마가 지는 구조”라며 “혼자 아이를 낳고 키워야 하는 이들이 도움받을 수 있는 곳이 너무 없더라”고 했다. 같은 경험을 한 강씨 또한 “원치 않는 임신일 수도 있고, 저마다 사정이 있을 텐데 기댈 곳이 없어지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며 “수사를 보며 제대로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환경을 누구도 만들어주지 않으면서, 마지막 지푸라기조차 잘라버리는 것 같았다”고 했다.
주사랑공동체교회에는 보육사와 상담사가 24시간 상주한다. 하루 24시간 중 어느 때 어머니와 아이가 찾아올지 몰라서다. 바깥벽에 설치된 베이비박스 문이 열리고 아이가 박스 안에 놓이면, 바로 ‘엘리제를 위하여’ 경보음이 울린다. 그러면 보육사 혹은 상담사가 바로 내부에 연결된 박스 문을 열고 “어머니, 고생하셨어요. 잠깐만 이야기하고 가세요”라고 외친다고 했다.
주사랑공동체교회에 따르면 최근 3년간(2020~2022년) 상담에 응한 어머니는 평균 97%에 이른다. 그중 22%의 아이들이 원 가정에서 자라게 되었고, 13%는 출생신고 후 입양을 갔으며, 65%가 시설(서울시아동복지센터)에 보내졌다고 한다. 임씨는 “베이비박스를 찾는 이들은 아이가 ‘그래도 잘 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곳을 찾게 된다”며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주면 좋겠다”고 했다.
https://www.khan.co.kr/national/health-welfare/article/202310062116015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309191115001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307051622011
전지현 기자 jhy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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