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촘한 서사의 힘’ 연인·무빙, 위기의 K-드라마에 희망 던져

남지은 2023. 12. 25.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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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문화계 결산 ② 드라마
서사를 쌓으며 성공한 드라마 ‘무빙’. 디즈니플러스 제공

2023년 드라마 시장은 위기였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등장 이후 한국 콘텐츠에 낀 거품이 올해 급속도로 빠지면서 혼란이 빚어졌다. ‘케이(K)’ 마크가 성공보증수표인 줄 알고 수년 전부터 제작편수를 늘렸더니 함량 미달의 작품이 쏟아졌다. 총제작비 500억원 이상인 ‘택배기사’ ‘경성크리처’ 등 기대작들이 빈약한 서사와 뻔한 전개로 혹평받았다. 제작비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는데 흥행확률이 낮아지니 제작사와 플랫폼 모두 위험부담이 커졌다. 촬영을 마쳐놓고 편성을 잡지 못한 작품도 100여편에 이른다. 지난 4월 캐스팅을 발표하고 촬영을 시작했던 ‘가스라이팅’은 5회가량 촬영 뒤 제작을 중단했고, ‘조폭인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는 촬영 준비 중에 접는 초유의 사태도 벌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혼란 속에서 본질에 충실한 작품이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볼거리에 치중하지 않고 내용 면에서 새로운 시도도 이어졌다.

빌드업, 힘을 받다

디즈니플러스 ‘무빙’은 10부작도 길게 느껴지는 시대에 20부작으로 등장했다. 인물 하나하나의 서사를 차근차근 보여주겠다는 강풀 작가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1~7부 내내 고등학생들 이야기가 등장하자 지루하다는 평이 나왔지만, 서사를 충분히 쌓은 덕분에 중반부를 지나면서 이야기는 힘을 받았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올해 드라마 화제의 키워드는 이야기를 서서히 쌓아가는 빌드업”이라며 “‘무빙’은 서사의 중요성을 보여준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짚었다.

극본, 연출, 연기 3박자 고루 갖추며 화제작이 된 ‘연인’. 문화방송 제공

올해 숱하게 나온 퓨전 사극 중에서 ‘연인’(MBC)이 예상밖에 성공한 비결도 빌드업이다. 장면 하나, 대사 한 마디 허투루 나오지 않고 두 인물의 감정을 서서히 끌어올리며 시청자들을 감정 이입하게 했다. 정 평론가는 “‘스위트홈2’ ‘디피2’가 실패한 것도 시즌1에서 메시지와 세계관을 개연성 있게 보여준 것과 달리 볼거리에 치중했기 때문”이라며 “한국 시청자들이 서사가 촘촘한 작품에 호응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소재, 금기를 깨다

막대한 제작비와 톱스타 출연이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 흐름에서 새로운 시도로 한국 드라마를 진일보시킨 작품도 등장했다. ‘남남’(ENA)이 대표적이다. 한국 드라마에서 처음으로 엄마의 성적 욕망을 수면 위로 끄집어올려 ‘닥터 차정숙’(JTBC) ‘잔혹한 인턴’(티빙) 등 엄마의 일하고 싶은 욕망에 집중했던 드라마와 차별화했다.

한국 드라마에서 처음으로 코다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눈길 끈 ‘반짝이는 워터멜론’. 티브이엔 제공

청각장애인이 드라마 중심에도 섰다. ‘반짝이는 워터멜론’(tvN)은 농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청인 자녀인 코다를 주인공 삼았다. 청각장애인 가족이 자연스레 이야기의 중심이 됐고 수어가 주요 언어로 등장했다. ‘사랑한다고 말해줘’(ENA)처럼 청각장애인의 사랑을 다룬 멜로드라마도 등장했다. 이 작품에서 청각장애인을 연기한 정우성은 “13년 전 이 드라마 제작을 시도했을 때는 청각장애인 주인공을 수용하기 힘든 분위기였는데, 이제는 사회적 의견도 성숙해 있고 미디어 환경도 달라진 것 같다”고 짚었다. 윤석진 대중문화평론가는 “플랫폼의 역할과 경계가 무너지면서 보다 자극적인 작품들로 경쟁하는 경향이 뚜렷해졌지만, 그런 가운데 본질에 충실한 새로운 시도의 성공은 의미 있다”고 했다.

배우, 몸을 던지다

센 작품에서 기존과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며 호평받은 사례가 늘었다. 고현정은 ‘마스크걸’(넷플릭스)에서 스스로 “얼태기(얼굴+권태기)”라고 말할 정도로 그간 보여온 익숙한 표정을 깨고 몸을 던져 딸을 지키는 김모미로 호평받았다. 한효주도 ‘무빙’에서 목숨 걸고 아들을 지키는 엄마이자 초능력자로 등장했다. 30대 배우가 고등학생 엄마로 등장해 모성애를 강조하는 역할을 맡는 것은 큰 도전이었다. 송혜교는 ‘더 글로리’(넷플릭스)에서 학교폭력 가해자한테 복수하는 인물로 연기폭을 넓혔다.

‘마스크걸’ 안재홍처럼 기존 이미지를 깨고 변신하는 배우들이 많았다. 넷플릭스 제공

남자 배우들은 사이코패스로 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랑의 이해’ 등에서 따뜻하고 감성적인 인물을 연기했던 유연석은 ‘운수 오진 날’(티빙)에서 사이코패스로 등장했다. 안재홍은 ‘마스크걸’에서 비제이(BJ) 김모미를 좋아하는 오타쿠로 변신해 파격적인 모습을 선보였다. 한 연예기획사 관계자는 “배우들은 캐스팅돼야 새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데 드라마 편수가 늘면서 기회가 자주 왔다”고 했다.

웹툰, 드라마가 되다

웹툰 원작이 늘면서 소재는 다양해지고 파격적이었다. 웹툰 원작은 드라마 서사가 실종된 주요 원인으로 꼽히지만, 드라마 소재의 원천이 된 것은 분명하다. ‘이재, 곧 죽습니다’(티빙)처럼 12번 죽었다 살아나는 환생도 가능해졌고, 고교 3학년이 수업 이후 군사훈련을 받는 ‘방과 후 전쟁활동’(티빙)도 웹툰이어서 가능했다. 딸이 닭강정이 되어 벌어지는 이야기 ‘닭강정’(넷플릭스)도 촬영을 완료했다.

웹툰 원작 드라마가 쏟아졌다. ‘이재, 곧 죽습니다’. 티빙 제공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는 실패율을 낮추고 소재가 다양하다는 점에서 제작사 구미를 당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2 만화웹툰 이용자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웹툰은 코믹+개그(38.8%), 액션(37.1%), 판타지(33.7%), 로맨스 판타지(32.8%), 드라마(31.5%)까지 장르가 다양하다. 웹툰은 새해에도 활발하게 드라마로 제작된다. 연상호 감독의 웹툰 ‘선산’(넷플릭스)은 1월19일, ‘내 남편과 결혼해줘’(tvN)는 1월1일 시청자들과 만난다.

배우들, 유튜브로 가다

이렇게 수없이 탄생한 드라마를 홍보하려고 배우들은 티브이(TV)가 아닌 유튜브로 향했다. 2020년을 기점으로 ‘아이유의 팔레트’, 영지의 ‘차린 건 쥐뿔도 없지만’, 비의 ‘시즌비시즌’, 피식대학의 ‘더 피식 쇼’ 등이 순차적으로 등장해 화제를 모은 유튜브 콘텐츠가 올해는 더욱 우후죽순 쏟아졌다. 어반자카파의 ‘조현아의 목요일밤’, 방탄소년단 슈가의 ‘슈취타’, 유재석의 ‘핑계고’, 신동엽의 ‘짠한형’, 장도연의 ‘살롱드립’ 등 모두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운수 오진 날’의 이성민과 유연석이 ‘살롱드립’에서 드라마를 홍보하고, 이동욱·공유 등은 ‘핑계고’에 나가 수다를 떨기도 한다. 유튜브는 심의 등을 눈치 볼 필요 없이 자유로운 대화가 가능한 점이 이유로 꼽힌다. 그러나 술 마시며 대화하는 ‘술방’이 늘고, 성적 취향 등 폭로가 난무해 우려의 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2023 한겨레 방송연예 대상 

한겨레 방송연예 필자들이 올해의 드라마를 꼽았다. 대상은 각 부분에 언급된 ‘작품+배우’ 중 최종 한편을 선정했다. 

대상 ‘연인’
윤석진 평론가 “전쟁 속 연인이라는 요소를 새롭게 해석하면서 차분하게 풀어냈다”
남지은 기자 “연기와 연출, 극본이라는 본질의 중요성을 입증했다”

올해의 작품 ‘무빙’ 
정덕현 평론가 “가장 한국적인 슈퍼히어로상을 보여줬다”
박상혁 피디 “한국적 정서를 담아 전세계를 홀렸다”
남지은 “서사를 쌓으며 성공하겠다는 의지에 점수”
윤석진 - ‘연인’을 올해의 작품으로 꼽아

올해의 배우 ‘남궁민’
박상혁 “상대역 호흡도 맞춰주면서 끝까지 중심을 잃지 않는다”
정덕현 “남궁민의 연기가 지상파 화제성에 불을 질렀다”
남지은 “눈빛까지 그 인물이 되는 배우”
윤석진 - ‘안은진’을 올해의 배우로 꼽아 

올해의 워스트 ‘7인의 탈출’, ‘코미디 로얄’
정덕현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윤석진 “우리는 대단하다는 근거없는 자신감이 망친 작품들”
남지은 “뭐든 적당히 해야 한다”
박상혁 - ‘택배기사’를 올해의 워스트로 꼽아

사심픽 
남지은 - 안재홍 (“‘마스크걸’ 오타쿠 연기는 끝판왕”)
윤석진 - 마스크걸 (“폭력이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고 이에 대응하는 여성 캐릭터를 보여준다”
정덕현 - 정신병동에도 아침은 와요 (“오티티 아닌 티브이에서 했으면 서서히 입소문 탔을 것”
박상혁 - 반짝이는 워터멜론 (“청각장애인을 중심에 세워 청춘물을 뽑아낸 시도에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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