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갑산 아래 길 위서 낳은 길님이…1959년의 ‘성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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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겁절에 질 가 갓집이라고 쫓아간 것이.
속없이 노무 방에 가 날라고 방문을 흔들흔들 헝께로 장에 가느라고 문을 잠가 부럿어.
"옛날 같으면 부끄럽고 창피해서 말도 못 허는디, 장에 갔다 오다가 길에서 난 딸 자랑하러 나왔다"고 이야기를 시작한 화자는 5분여 제한시간을 넘겨 꺼진 마이크에 대고 "부자여, 부자여" 하고 덧붙였다.
1959년 겨울, 영광 불갑산 아랫마을의 이 이야기는 내가 7년 전 자랑대회 때 보았던 것인데 이따금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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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이 | 잡글 쓰는 작가
‘… 어른들이 가지 마라고 하는 장을 갔으면 불만도 받고 얻어들었을 것인디, 그냥 장에 갈 때는 암시랑 안 허고 갔단 말이요. 한참 장을 보고 있응께, 나는 애기를 낳아도 배도 안 아프고 허리도 안 아프고 낳아, 근디 아랫배가 쪼까 이상허더라고. 긍께 마음이 급해집디다. 우리 사는 디가 불갑산 밑이어라. 그래서 오키로나 걸어서 장에를 가. 장을 보는디 마음이 급해서 대충 사 가지고 계산도 잘 못허겄더라고. … 장 본 놈을 갖고, 근디 겨울이여. 12월23일, 한참 추울 때여. 장에서 보지란히 간다 해도 오키로나 된 디를 이키로 포도시 옹께, 인자 저 거시기 옛날에는 그것 보다가 머이라 했는디, 머 상수, 아니 양수, 그것이 터졌어. 더 못 가겄어. 막 문 앞으로 나올라 그래. 그래서 포도시, 내 나이가 몇이냐 허면 스물세살이여.
… 엉겁절에 질 가 갓집이라고 쫓아간 것이. … 속없이 노무 방에 가 날라고 방문을 흔들흔들 헝께로 장에 가느라고 문을 잠가 부럿어. 아 그래서 그 집이 울타리도 없고 담도 없고 외따로 있는 집이여. 마당에다 나락 훑고 처진 것 쓰러 모타 논 것이 있더라고. 인자 급헝께 거그서 낳았제. 노무 마당에서. 아 그런디, 낳고 앉었응께 양수 터진 놈에다가 애쓰고 오느라 땀 흐른 놈에다가, 인자 춥기는 허고 애기를 안고 못 앉어 있겄어. 그래서 태도 안 짜르고 안고 들어갔어, 토방으로. 거그서 안고 있응께 태가 나와. 해서 장어찜 산 것하고 내 내복 벗고 바지 벗은 놈하고, 겉에는 치매만 둘렀제. … 흙 토방이라 피가 천지여. 부엌에 강께 쇠죽을 써 놨드라고. 불 땐 디서 재를 긁어다가 그 토방 흙에다가 헛쳤어. 괭이로 덮어 놓은 것을 살살 긁어다가 버리고, 애기를 보듬고 가는디 이키로 왔응께 인자 삼키로 남었제. 지금은 다리도 놓고 그런디 그전에는 또랑 큰 놈이 둘 있거등. 불갑산에서 내려온. 그때는 돌다리로 건너댕겼어. … 치매만 둘리고 인자 피는 다리 타고 줄줄 내려오고. 그렁께 고무신에 한나 차가지고 걸을 수가 없어서 또랑 속으로 들어가서 후적후적 씻고, 또 쪼까 걸어가면 또 신짝으로 한나 차버리고, 또 또랑으로 들어가서 후적후적 씻고…’
이 대목에서 ‘딱딱’ 격탁 소리가 울려 이야기가 끝났다. 사회자가 물으니, 그 딸 이름이 ‘길님’이, 쉰일곱이라 한다. “옛날 같으면 부끄럽고 창피해서 말도 못 허는디, 장에 갔다 오다가 길에서 난 딸 자랑하러 나왔다”고 이야기를 시작한 화자는 5분여 제한시간을 넘겨 꺼진 마이크에 대고 “부자여, 부자여” 하고 덧붙였다. 그 딸이 부자로 잘산다는 얘기를 꼭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화자는 정정옥(당시 79)씨, 그 뒤로 다섯을 더 낳았다. 2016년 제6회 전라도말 자랑대회에서 ‘질로 존 상’(대상)을 탔다. 광주민속박물관과 월간 ‘전라도닷컴’이 주관한 이 대회는 2011년 시작하여 올해 11회로 이어진다. 밭이랑에 쥐불 놓다가 남의 선산 묘 다 태워버린 사연 등 구수하고 찰진 입담으로 인기가 많은 대회다.
1959년 겨울, 영광 불갑산 아랫마을의 이 이야기는 내가 7년 전 자랑대회 때 보았던 것인데 이따금 생각난다. 그 정신에도 토방의 피 위에 재를 얹어 괭이로 긁어내는 대목, 장에서 산 장어찜하고 자기 옷가지 챙기고, 그리고 갓난애를 안고 3㎞를 걸어오는 장면은 경이롭다. 산모도 산모려니와, 배불러 장에 간 새댁이 남의 집에서 초산하고 먼 길을 걸어 딸을 안고 사립문에 들어섰을 때, 그 집 남편과 시부모 심정을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신산한 삶이라 하지만, 천진한 얼굴로 목젖이 보이게 웃어가면서 이리저리 몰아가는 이 이야기 속에 매운맛, 신맛 말고도 눈물 나고 웃음 나고 애가 터지는, 세상 온갖 맛이 다 들어 있다. 어느 문학작품이 이만할까? 세월이 지나 잊어버릴 만한데도 이 이야기가 자꾸 뒤따라와 뜬금없이 생각난다. 밀쳐놓은 것들이 다가오려 하듯이, 효가 그런 것 아닐까 싶기도 하고, 어느 생명이 귀하지 않을까, 탄생이란 그 자체로 ‘성탄’(聖誕)이로구나 그런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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