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빨간’ 언니들 “김연경보다 잘한 거예요”

서혜미 기자 2023. 12. 25.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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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누구나 운동할 권리 실천하는 호호체육관… 배구 하며 ‘운동으로 운동하는’ 청소노동자와 대학생
2023년 12월8일 ‘호호체육관’에서 김윤혜 포항시체육회 배구단 감독과 배구 수업을 듣는 수강생들의 단체 사진.

“무릎! 무으르읖! 팔 펴고! 팔꿈치를 붙여! 팔꿈치를 펴줘!”

매주 금요일 정오를 넘긴 시간이면 서울 마포구 서강대 체육관에서는 세 가지 소리가 쉴 새 없이 번갈아 들렸다. 김윤혜(56) 포항시체육회 배구단 감독이 던진 공을 수강생들이 받아서 치는 소리, 김 감독이 수강생들의 자세를 지도하며 목이 터져라 외치는 소리, 그리고 수강생이 친 공이 높이 올라간 뒤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텅’ 하고 튀어 오르는 소리. 때때로 웃음소리도 더해졌다. 공을 칠 차례가 된 사람이 헛손질할 때였다. 공을 빗맞힌 사람은 뒤돌아서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키 176㎝인 김 감독은 농담하거나 호쾌하게 독려했다.

“스포츠는 누구나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

서강대 체육관에서는 매주 금요일 낮 12시부터 약 40~50분 동안 전문 체육인과 청소노동자, 대학생이 다 함께 모여 운동하는 공간이 열린다. 문화연대 대안체육회가 2022년 11월부터 연 ‘호호체육관’ 프로젝트다. ‘모두의 운동’, 즉 성별·연령·장애·신체능력 등과 관계없이 모두가 스포츠를 즐길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시작했다.

지도자 경력만 20년째인 김 감독은 아시아선수권대회(1987년), 제24회 서울올림픽(1988년)에서 여자 국가대표로 코트 위를 뛴 적 있는 전문 지도자다. 수강생은 김 감독과 연령이 비슷한 50·60대 여성으로, 서강대 청소노동자들이다. 서강대 인권실천모임 ‘노고지리’나 교지, 여자농구 동아리 소속 대학생들도 배구수업에 참여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정한 스포츠 인권 헌장은 “스포츠는 인간 누구나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라고 규정한다. 국제사회는 일찍이 기본권으로서 스포츠권을 논의해왔지만, 여전히 국내에선 스포츠 정책이나 관련한 사회적 논의는 전문 스포츠 선수의 영역에 국한되는 경향이 강하다. 2019년 체육계 ‘미투’ 운동, 2020년 최숙현 트라이애슬론(철인 3종 경기) 선수가 집단 가혹행위로 숨지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나온 정부 대책과 논의 역시 이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2023년 12월8일 서강대 ‘호호체육관’ 배구 수업에서 공을 치고 있는 서강대 청소노동자들과 대학생들의 모습.

문화연대는 호호체육관을 ‘운동(Exercise)으로 운동(Movement)하기’의 일환으로 기획했다. “대한민국 스포츠계에 산적한 인권문제를 해결하고, 더 많은 사람이 온전히 스포츠를 향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보다 넓은 관점에서 스포츠를 이해해야 한다”는 취지다. 2022~2023년은 서강대에서만 운영했지만, 2024년 상반기에는 서강대에 이어 서울 서부권역의 다른 대학에서도 호호체육관을 열 계획이다. 하반기에는 참여 대학을 2개 더 늘리려 한다.

2023년 12월1일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붉은색 작업복 위로 두꺼운 패딩을 입은 수강생들이 삼삼오오 체육관에 모여들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최성은(56)씨와 이향란(59)씨는 패딩을 벗어둔 뒤 잠시 스트레칭을 했다. “저번에 벽에 대고 (연습)하라 했어.”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말했다. 이들은 각각 배구공을 들고 체육관 한쪽 벽으로 다가갔다.

한 주 전 열린 수업에서 김윤혜 감독은 수업을 끝내며 당부했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도착한다면, 벽에다 공을 치면서 언더핸드 토스 연습을 하고 있으라고. 이 말을 떠올린 두 사람은 무릎을 살짝 굽히고, 양쪽 팔을 앞으로 모아 쭉 편 자세를 유지하며 배구공을 벽에 대고 쳤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청소노동자들과 학생들도 각각 공을 들고 ‘벽치기’를 했다.

요가수업, 좋지만 관계 형성 어려워

수업이 시작되자 열 개 넘는 배구공이 체육관 안을 정신없이 날아다녔다. 이날 수업 참여자는 총 11명으로 청소노동자 6명, 학생이 5명이었다. 그 밖에 문화연대 활동가 1명이 수업을 보조했다. 김 감독은 이날 약 50분 동안 ‘무릎’과 ‘이마’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말했다. 언더핸드 토스를 연습할 때는 무릎 높이에서 위로 공을 쳐야 하고, 오버핸드 토스를 할 때는 이마 위쪽에서 공을 쳐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마가 여기 있죠?” 이마 위보다 낮은 위치에서 공을 친 수강생에게 김 감독이 자신의 턱 밑을 가리키며 농담했다. 웃음소리가 자주 들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프로젝트 이름에 ‘호호’를 붙인 활동가의 바람처럼 체육관 안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제 한국에서는 운동하는 여성이 낯설지 않다. 한때 운동은 남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엔 고강도 웨이트 트레이닝을 받고 갈라진 근육을 보디 프로필 사진에서 드러내는 여성, 유도나 주짓수처럼 격렬한 격투기를 배우는 여성, 풋살·농구·테니스 등 단체스포츠를 즐기는 여성이 늘고 있다. 그렇더라도 ‘중장년 여성’과 ‘배구’라는 단어의 조합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문화연대가 처음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청소노동자의 부상을 예방하기 위해 근육을 늘려주는 요가수업을 기획했던 이유다.

청소노동자들과 함께 배구 수업을 듣는 서강대학생이 날아오는 공을 치기 위해 자세를 잡고 있다.

수강생들의 수업 만족도는 높았다. 그러나 같은 공간에서 운동해도 이들끼리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기 어려웠다. 박이현 문화연대 활동가는 “요가수업을 들으며 서로서로 조금씩 웃음을 나누긴 하지만, 사회적 관계가 형성된다고 보긴 어려워서 팀스포츠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한편으로 ‘하늘을 볼 수 있는 운동’이었으면 했다. 청소노동의 특성상 허리를 숙이는 일이 많기 때문에 몸을 위로 젖히는 운동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운동은 배드민턴이었다. 하지만 라켓 구매 비용이 만만찮고 보관 문제가 있는데다 ‘테니스 엘보’처럼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팀스포츠에 가깝고 별도 준비물 없이 참여할 수 있는 운동을 찾다가 배구가 떠올랐다.

‘받고, 올리고, 때리는’ 배구는 협력이 중요한 스포츠다. 상대편 서브를 받아내 우리 편 공격수가 칠 수 있게 하늘로 띄운다. 공격수는 그 공을 때려서 상대편 진영으로 보낸다. 규칙은 간단하다. 한 팀의 선수들은 최대 세 번까지 공을 칠 수 있다. 그 안에 상대편 진영으로 공을 넘겨야 한다. 하지만 한 선수가 공을 두 번 이상 치는 것은 반칙으로 간주한다. 이 때문에 축구·야구·농구 등 다른 팀스포츠 이상으로 선수들의 협력이 중요하다.

공을 맞혔을 때 성취감, 어울려 하는 즐거움

단체 안에서조차 과연 수강생이 모일지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박이현 활동가는 “‘중년 여성이 힘든 스포츠를 싫어할 것’이라는 생각이 우리가 먼저 (그분들에게) 선을 긋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말한 박 활동가도 ‘안 모이면 다른 운동을 하자’는 마음이었다. 2023년 1학기(1기), 2학기(2기)에 각각 청소노동자 약 10명이 배구수업을 신청했고, 대학생 예닐곱 명도 함께 수업을 들었다.

“뭐랄까, 마치 동심으로 돌아간 것처럼 즐겁고 몸을 쓰는 운동을 하니까 움츠러드는 마음에 자신감도 붙어서 좀더 사람이 쾌활해지는 것 같더라고요.”

최성은씨 얼굴은 배구수업을 듣는 내내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2023년 2학기부터 참여했다. 1학기 수업 때 동료 이향란씨를 따라 몇 차례 구경하러 왔다. “그렇게 재미있는 것 같진 않아 보였다.” 팔목이 약해서 공을 치는 것이 무리일 듯했다. 하지만 2학기 수업 수강생을 모집할 때 이씨가 ‘신청자가 적어서 재밌는 수업이 없어지면 어떡하냐’고 애태우는 바람에, 인원수를 채워주기 위해 신청했다. 처음엔 몸이 아팠다. 팔목에 멍도 들었다. “두 번째 수업은 안 가려다가 미안해서 갔는데, 그렇게 또 가고 가다보니까 재미를 느끼게 됐다. 뛰면서 땀을 흘리고 나면 몸이 굉장히 가벼워진다.”(최성은씨)

2023년 12월1일 문화연대 대안체육회가 진행하고 서울 마포구 서강대 체육관에서 열리는 ‘호호체육관’ 배구수업에서 한 청소노동자가 반대편 코트로 공을 보내려 하고 있다.

영하의 날씨에도 코트 위를 뛰어다녀서 볼에 옅은 홍조가 가시지 않던 전창헌(62)씨는 “처음엔 손이 많이 아프고 제대로 맞히지 못했는데 지금은 잘되니까 너무 재밌다. 다른 엄마들도 재밌다고 한다”고 말했다. 지난 학기에 수업을 들었던 전씨는 이번 수업의 우등생이다. 박미숙(58)씨도 “선생님이 요구하는 대로 공을 잘 맞힐 때 느끼는 성취감도 크고, 여럿이 어울려서 하는 운동의 즐거움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세 명 모두 “배구수업을 듣고 나면 지치기보다는 에너지가 생기는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주변 동료들에게 배구를 전파하는 전씨는 2024년 상반기에 배구수업이 열리면 그때도 다시 신청하겠다고 밝혔다.

‘흥미’와 ‘부상’은 김윤혜 감독이 호호체육관에서 배구수업을 진행하며 가장 신경 쓰는 요소다. 중장년층의 유연성과 순발력은 젊은층보다 떨어질 수밖에 없다. 또 이른 아침부터 일하고 왔기 때문에 몸에 쌓인 피로도 고려해야 한다. 김 감독은 “최소한 부상 염려가 없도록 운동 방식을 생각해서 수업을 준비한다”며 “‘오늘 그래도 몸이 좀 움직이긴 했어’라는 느낌으로, 공이 내 의지에 따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갔을 때의 재미를 느끼게 하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정말 뜻밖에도 배구를 좋아해주시고, 작은 기쁨들이 중간중간 샘솟아가는 걸 보면 나도 기분이 좋다”며 “내게도 이 수업은 재미있고 새로운 도전이어서 오히려 에너지를 받아간다”고 했다. 언젠가 지도자를 은퇴하면 전문 지도자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단 몇 번이라도 배구를 가르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오던 터였다. 그는 호호체육관 수업을 계기로 “우리 일하는 여성들, 혹은 집에만 계셨던 분들에게 내가 재능 기부를 할 수 있다면 더없는 즐거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고 했다.

“김연경보다 잘한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이날 수업은 서브 연습과 미니게임으로 마무리됐다. 키 160㎝가 채 안 되는 청소노동자들이 때린 공은 때때로 네트를 넘기지 못하기도 했다. 넘어갈 공은 소리부터 달랐다. 제대로 친 공은 ‘탕’ 하는 소리가 나서 포물선을 높게 그리며 네트를 넘어갔다. 옆에서 박이현 활동가가 “나이스!”라고 추임새를 넣었다. 김 감독은 “이 키에 이 정도면 김연경보다 잘한 거야. 김연경보다 잘한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라고 말했다. 수업이 끝나고 다시 겉옷을 챙겨 입고 나가는 수강생들의 얼굴이 만족스러워 보였다.

서혜미 기자 ham@hani.co.kr, 박승화 선임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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