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빙 직원 이름 모두 외워준 노통, 마지막날 주방직원 부른 박통...”
천상현(55) ‘천상현의 천상’ 대표는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까지 다섯 대통령의 밥상을 책임진 국내 최연소, 최장수 청와대 요리사다.
한 대통령 임기 동안 차린 밥상만 대략 5000끼 이상. 대통령의 해외 순방과 휴가 때도 동행하다 보니 측근이나 언론을 통해 알려지지 않은 일화나 인간적인 면도 많이 접했다.
그는 20년4개월간 대통령들의 밥상을 차리다가 2018년 7월30일 청와대를 나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중화요리점 ‘천상현의 천상’에서 국민을 위한 밥상을 내놓고 있다. 지난 12일 진행한 인터뷰와 그가 최근 펴낸 ‘대통령의 요리사’(쌤앤파커스)의 내용을 바탕으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다섯 대통령 내외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청와대에는 당초 한식, 일식, 양식 요리사만 있고 중식 담당은 없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이 중식을 좋아해 신라호텔에서 근무하던 천 대표가 최초의 중식 요리사로 청와대에 입성하게 됐다.
대식가였던 김 대통령은 중식이 나오면 항상 남김없이 다 먹었고, 청와대를 떠나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권양숙 여사가 천대표에게 부탁해 보내준 불도장을 먹고 기력을 회복하기도 했다.
천 대표는 “설날에는 청와대 요리사들의 세배도 받으셨는데, 인사를 받았던 대통령들 가운데 유일하게 세뱃돈을 주시고 덕담과 고맙다는 인사를 빼놓지 않으셨다”고 말했다.
대통령들이 여름마다 청남대로 휴가를 가면 청와대 요리사들도 동행한다. 그러나 청남대는 직원들 숙소가 마땅치 않아 주방 아래에 있는 기계실 옆방에서 6, 7명이 모여 함께 자야 했다.
그런데 이희호 여사가 우연히 그 숙소를 보고 “여기서 어떻게 잠을 잡니까?”라며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청와대 본관 관리자에게 직접 지시를 내려 급하게 컨테이너로 된 별도 숙소를 마련해줬다.
“이렇게 맛있는 콩나물국은 처음 먹어봤네.”
취임 첫 날 콩나물국과 생선구이, 밑반찬 몇 가지가 전부인 소박한 아침상을 받은 노무현 대통령이 식사를 마치고 직접 주방으로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천 대표는 “보통 운영관이나 홀 직원을 통해 말씀하시는데 직접 주방을 찾아와 요리사들을 칭찬해주신 대통령은 노 대통령이 처음이었다”고 회상했다.
노 대통령은 주방 뒤뜰에서 담배 피우는 직원들을 발견하고는 “여기가 담배 피우는 곳인가요? 그럼 저도 같이 한 대 피겠습니다”라며 옆에 섰다. 어느 순간부터 노 대통령과 마주치는 일이 잦아졌다. 알고 보니 노 대통령이 청와대 경내 직원들의 출입이 통제된 대통령 전용 길을 모두 해제시켰기 때문이었다.
노 대통령은 홀에서 서빙하는 직원들 이름을 모두 기억하고 불러준 유일한 대통령이기도 했다.
일요일 아침에는 직원들더러 절대 나오지 말고 쉬라면서 직접 라면을 끓였다고 한다.
임기 초 아들 내외가 잠깐 청와대에 들어와 살 때는 권양숙 여사가 “우리가 식사하는 시간 외에는 별도로 상 차리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권 여사는 노 대통령 서거 10주기에 함께 지냈던 청와대 직원들을 봉하마을로 초대하기도 했다. 천 대표는 “지위가 높은 청와대 공무원도 아닌 평범한 직원들을 무려 30명이나 초대해주셔서 덕분에 동료들과 오랜만에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그는 “여사님 음식 챙겨주시는 분이 ‘여사님이 셰프님이 만들어주신 중식을 그리워한다’고 알려줬는데 그 말을 평생 잊을 수 없다”면서 “언젠가 꼭 한번 여사님께 직접 만든 짜장면을 대접해드리고 싶다”고 강조했다.
대통령과 달리 영부인들은 주방에 자주 드나들었다. 특히 김윤옥 여사는 역대 영부인 중 가장 요리 솜씨가 좋았고 한식에 대한 관심도 남달랐다고 한다.
특히 김 여사가 평소 손주들에게 자주 해준 ‘논현동 닭강정’은 청와대 요리사들이 최고의 레시피로 인정한 메뉴였다. 김 여사의 닭강정과 등심바싹불고기는 박근혜, 문재인 대통령 때도 메뉴에 포함해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김 여사는 정상 만찬 등 주요 행사에서 직접 한식 신단을 짜거나 적극적 의견을 내기도 했다. 특히 그동안 정통 궁중음식 고집했던 과거에서 탈피해 김 여사가 한식 메뉴를 모던 한식코스로 바꾸고, 국빈들의 취향을 반영해 일반 코스, 해산물 코스, 채식 코스로 나눴다.
천 대표는 “양재동에 식당을 열었을 때가 하필 코로나 팬데믹 시기여서 힘들었는데, 김 여사께서 지인들과 몇 차례 오셨다”면서 “잊지 않고 일부러 찾아와주셔서 정말 감사했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노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자 마지막으로 주방을 찾은 대통령이다.
천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께서 생일 만찬이 끝난 후 비서관도 없이 혼자 직접 주방에 찾아오셔서 ‘잘 먹었어요. 잘 준비해줘서 고마워요’라고 인사를 건넸다”고 말했다. 요리사들은 가족 없이 홀로 생일을 맞는 박 대통령의 쓸쓸함을 헤아려 최선을 다해 음식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청와대에서의 마지막 생일은 더없이 쓸쓸했다. 취임 후 맞이한 첫 생일에는 국무총리와 대통령비서실장을 비롯한 수석비서관들이 함께 모여 훈훈한 분위기 속에 생일 오찬을 하고, 그다음 해에는 축하노래를 들으며 케이크에 초를 끄기까지 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의 결과를 앞둔 65번째 생일에는 참모진과 간단히 오찬만 함께 했다.
대통령의 생일 정찬에는 보통 소고기미역국과 불고기 혹은 갈비찜, 삼색 전과 기본 나물 3종을 포함한 몇 가지 반찬이 포함된다.
박 대통령은 2017년 3월 10일 청와대를 떠나던 날 마지막 일정으로 관저 청소 직원과 주방 요리사들을 모두 대식당으로 불렀다. 그리고는 “이렇게 안 좋은 일로 나가게 됐지만 언젠가 진실은 밝혀질 것”이라며 “지난 4년간 저를 위해 음식을 해주시고 청소를 해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라 고개를 떨구고 있던 천 대표의 눈에 대통령의 구멍 난 스타킹 사이로 발가락이 들어왔다. 늘 단정하고 빈틈없던 대통령이었는데 구멍 난 스타킹에 초췌한 얼굴을 보니 그 짧은 순간에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며 안타까웠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정운영과 관련되지 않은 일로 대통령 내외가 가족 혹은 사석에서 먹은 식사비용을 별도로 지불했다. 식사비용에 대한 개인정산 시스템을 처음 도입한 것이다. 그래서 이른바 ‘청와대 가계부’가 생겼고, 주방에서는 매월 정산한 식대를 청무비서관실로 보냈다.
천 대표는 문 대통령 취임 후 1년여 만에 청와대를 떠나 다른 대통령처럼 추억이 많지는 않다고 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국밥에 반찬 하나, 생선회도 막회로 좋아하는 노 대통령과 식성이 비슷했다. 늘 먹던 음식만 찾는 편이라 박 대통령 때처럼 다양한 식재료를 공수해 새로운 시도를 하는 노력도 덜했다.
문 대통령은 취임 초기 홀 직원에게 “노무현 대통령 때 일한 주방 사람이 아직도 있는가?”라고 물었다. 천 대표가 있었지만 홀 직원이 당황한 나머지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천 대표는 “왜 그런 질문을 하셨는지 궁금하다”면서 “아마 은연중 느껴지는 익숙한 맛과 향에서 이제는 아득해진 옛 친구의 모습을 본 것은 아닌가 감히 짐작해본다”고 말했다.
김수미 선임기자 leol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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