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창고, 전시관·작업공간이 되다
예술 프로젝트로 지역서 호응
두번째 전시 ‘나 사는 집’ 진행
“알록달록한 색을 조합해 그림을 그리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안하고 기분까지 좋아집니다.”
제주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에서 일평생을 살아온 김옥순씨(78)는 올해 처음 붓을 잡은 느낌을 이같이 표현했다. 김씨는 최근 마을에서 열린 미술품 전시행사 ‘할머니의 예술창고 2023, 나 사는 집’에 참여한 12명의 할머니 화가 중 한명이다.
‘할머니의 예술창고’는 선흘볍씨마을협동조합과 소셜뮤지엄이 2021년부터 추진한 예술 프로젝트다. 할머니의 희로애락이 담긴 주택 안 창고를 미술작업과 전시에 활용함으로써 예술 공간으로 승화했다. 할머니만이 표현할 수 있는 담백하고 독특한 예술 세계를 엿볼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술교육을 비롯해 행사 전반을 총괄하는 최소연 소셜뮤지엄 예술감독은 “다른 지역에 살다가 제주로 귀촌하면서 할머니들의 삶에 관심을 두게 됐다”며 “삶의 공간인 창고를 보고 어느 예술가의 작업 공간보다 멋지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본격적인 전시는 지난해 ‘할망 해방일지’를 주제로 시작했다. 올해 열린 두번째 전시 ‘나 사는 집’은 9일부터 17일까지 열렸다. 전시관은 선흘체육관과 창고 등 마을 안 9곳에 마련됐다.
각 전시관에 걸린 그림에는 여성으로 사는 삶, 고된 농사일, 가슴 아픈 역사와 같이 할머니의 현재 생활과 과거 발자취가 고스란히 담겼다.
“이 그림은 우리 집 우영(‘텃밭’의 제주 방언)이고, 저건 먼저 떠난 남편과 살던 옛날 집 모습입니다. 그땐 매일없이 밭일만 하고 살았지요.”
할머니들은 직접 그린 그림이 걸린 전시관을 지키며 관람객에게 작품의 의미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최 감독은 “할머니들은 그 어느 작가보다 작품 속에 담긴 이야기를 잘 전달한다”며 “설명을 듣고 눈시울을 붉히는 관람객도 상당수”라고 말했다.
할머니들은 그림을 배우고 나서 일상에 생기와 웃음이 넘치고, 전보다 시간이 빨리 흐른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해와 올해 전시에 모두 출품한 홍태옥씨(86)는 “전에는 허전하고 무료한 시간을 많이 보냈는데, 지금은 그림 그릴 시간이 부족할 정도”라고 말하며 미소지었다.
김씨는 “그림을 주제로 대화를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며 “작품활동을 하며 종종 추억에 잠기는데, 완성하기 전까지 자리에서 잘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할머니의 예술창고’는 할머니뿐 아니라 마을 주민의 적극적인 참여로 완성도를 더했다. 한 마을 목수는 세월의 흔적이 깃든 목재를 활용해 전시관을 꾸며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지역청년은 전시 기념품을 기획·제작해 방문객에게 선보였다.
기념품 제작을 주도한 김지현씨(28)는 “어려서부터 살아온 마을에 전시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기념품 제작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며 “두달 정도 바쁘게 준비했는데, 기대보다 사람들의 반응이 좋아 뿌듯하다”고 밝혔다.
이 프로젝트는 점점 인지도를 얻어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보고 찾아오는 관광객은 물론 지역청소년 체험학습 장소로도 인기를 끌고 있어서다. 최 감독은 “많게는 하루 약 500명까지도 방문하는데, 소문이 나면서 전시 기간을 연장해달라는 요청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들의 작품활동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김인자씨(86)는 “3년 전 장난처럼 시작했던 그림수업이 이제는 큰 행사가 돼버렸다”며 “올해는 몸이 좋지 않아 그림을 별로 못 그렸는데 내년에는 더 왕성하게 활동할 것”이라는 의지를 내비쳤다.
아울러 시가 추진한 ‘제주형 마을 만들기 사업’ 대상에 최근 선흘리가 선정되면서 내년부터 2028년까지 마을 미술관과 이주 예술인을 위한 작업실을 조성할 기회를 잡았다. 이로써 할머니들의 작품활동 기반이 더욱 탄탄해질 것으로 보인다.
최 감독은 “지금과 같이 할머니와 친구처럼 우정을 나눌 계획”이라며 “이들이 예술가로서 성장하는 과정을 응원하고 돕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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