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는 '어느 개가 짖어!' 했고, 정조는 '탕탕평평평평탕탕!' 외쳤다[이기환의 Hi-story]
‘탕탕평평…’. 국립중앙박물관이 영조 즉위 300주년을 맞아 개최 중인 특별전의 제목이 좀 ‘쨍’ 합니다.
영조(재위 1724~1776)와 손자 정조(1776~1800)가 ‘탕탕’하고 ‘평평’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펼친 ‘탕평’과 관련된 특별전입니다. 영·정조가 탕평책을 쓰면서 글과 그림을 통해 소통했던 방식을 한번 들여다보자는 것이라 합니다.
이 특별전을 보면서 두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삽살개’가 등장하는 특별전 포스터가 그것입니다.
또 하나는 특별전 제목인 ‘탕탕평평’인데요. 이 대목에서 웃음이 터졌습니다. ‘탕탕평평’도 모자라 ‘탕탕평평평평탕탕(蕩蕩平平平平蕩蕩)’이라고 새긴 정조의 장서인(규장각 소장)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어느 개가 짖어!”
‘삽살개’ 그림을 살펴볼까요. 영조가 화원 김두량(1696~1763)의 ‘삽살개’ 그림에 직접 ‘어제시’를 남겼습니다.
“밤에 사립문을 지키는 게 너의 소임이거늘(柴門夜直 是爾之任) 어찌하여 대낮에 길에서 이렇게 짖고 있느냐(如何途上 晝亦若此)’는 내용입니다. 과연 화면 가득 그려진 삽살개가 고개를 치켜들고 이빨을 드러낸 채 사납게 짓고 있습니다.
전시기획자는 “영조가 탕평을 반대하는 무리에게 ‘주제를 모르고 나서지 말고 네 본분을 지키라’고 비판했다”고 해석했어요. 이것이 혹시 아전인수의 해석이 아닐까요. 마침 김두량의 ‘삽살개’ 그림을 다룬 논문이 있네요.
삽살개는 원래 래원주인을 지키고 온갖 삿된 존재를 물리치는 충견으로 알려졌죠.
그러나 그런 삽살개가 주인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위협한다면 그 개는 주인을 무는 맹견일 따름입니다.
영조는 ‘계해(1743년) 6월 초하루 다음날(2일)’ 김두량의 그림에 어제시를 남겼습니다.
그러고보면 화가 김두량도 대단한 분이죠. ‘삽살개’ 뿐 아니라 김두량의 ‘사계산수도’에도 영조의 어제글이 보입니다. 김두량의 <고사몽룡도>에는 “먹을 쓰는 법이 기고(奇古·기이하고 고아)하여…주상(영조)께서 ‘남리’라는 호를 하사했다”는 표암 강세황(1713~1791)의 발문이 남아있습니다. 그만큼 영조의 사랑을 받은 화가였습니다.
그러한 김두량의 ‘삽살개’ 그림을 보면 참 생동감 넘치게도 그렸습니다. 짖는 입과 혀의 모양, 그리고 옆으로 누운 귀, 바짝 곤두선 털, 치켜든 꼬리…. 얼마나 사납게 짖어댑니까. 다른 개 그림은 어떨까요.
같은 김두량의 ‘흑구도’에 표현된 개는 풀밭에 쪼그리고 앉아 뒷다리로 가려운 몸통을 긁고 있습니다. 노곤한 모습이죠. 이암(1499~?)의 ‘모견도’ 등 다른 작품에도 ‘삽살개’처럼 사납개 짖는 그림은 없습니다. 그래서 영조가 김두량에게 ‘짖는 개 좀 그려’하고 명하고는 ‘(신하의) 본분도 모르고 떠들어대는 붕당의 다툼’을 꼬집었다는 해석이 나온 겁니다.
■침전 이름도 ‘탕탕평평실’
이제 ‘탕탕평평평평탕탕’ 등을 새긴 정조의 ‘장서인’을 봅시다. 워낙 책벌레였던 정조였으니 소장본에 여러가지 인장(장서인)을 찍은 분으로도 유명합니다. 그중 ‘뜻을 크게 갖고 정진하라’는 뜻이면서 정조의 별호이기도 한 ‘홍재(弘齋)’가 우선 눈에 띄고요. ‘…만기(萬機)…’라는 장서인도 유독 많아요. 예부터 “천자(군주)는 하루에 만가지 일을 처리한다”고 해서 ‘일일만기(一日萬機)’(<서경> ‘고요모’)라 했습니다. ‘만기친람’이 여기서 유래됐죠.
‘탕평’ 관련 장서인 중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 있어요. “세상에 다양한 물(만천)이 있지만 달(군주)은 그 형태에 따라 똑같이 비춘다”는 뜻인데요. 즉 세상의 주인인 군주는 백성의 다양한 능력을 골고루 활용하는 존재라는 거죠.
그러나 모든 장서인 중 ‘고갱이’는 ‘탕탕평평평평탕탕(蕩蕩平平平平蕩蕩)’입니다.
이 장서인을 얼핏보면 아무리봐도 ‘탕평평탕’으로만 보입니다. 도대체 뭘 보고 ‘탕탕평평평평탕탕’이라 할까,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죠. 그런데 서화연구자가 단번에 알려주더라구요. “‘탕’자 밑에 ‘〃’, ‘평’자 밑에 ‘〃’을 보라”는 겁니다.
그 ‘〃(땡땡)’이 반복부호라는 겁니다. 아! 그렇게 해서 읽으니까 ‘탕탕평평평평탕탕’이 됩니다.
얼마나 ‘탕평’을 갈구했으면 이렇게 ‘탕탕평평평평탕탕’을 반복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요.
그 뿐이 아닙니다. 정조는 당신의 침전 이름도 ‘탕탕평평실’로 지었습니다.
“나는…침전에 특별히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편액을 달고 ‘정구팔황(庭衢八荒) 호월일가(胡越一家)’ 글자를 크게 써서 창문 위에다 걸어 두었다. 아침 저녁 눈여겨 보면서 끝없는 교훈으로 삼아오고 있다.”(<정조실록> 1792년 11월6일)
‘정구팔황 호월일가’는 ‘변방도, 오랑캐도 앞뜨락이나 한 집안처럼 여긴다’는 뜻입니다. ‘지역이나 당색에 따른 차별은 절대 없다’는 다짐을 잠자리에서까지 되새긴 겁니다.
■약을 조제하듯 탕평
‘탕탕평평’은 “붕당과 편파가 없으면 왕도(王道)가 탕탕하고, 평평하다”는 <서경>(‘주서·홍범’)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홍범’은 ‘홍범구주’의 준말이고요. 하나라 우왕이 하늘의 뜻에 따라 정한 ‘9개 조목(九疇·구주)의 큰 법(洪範·홍범)’을 가리킵니다. 그중 5번째 조목인 ‘황극(皇極)’에 ‘탕탕평평’ 구절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탕탕평평’의 핵심조건이 있습니다.
‘임금이 표준을 세워 탕평을 이룬다’는 겁니다. 조선의 탕평책 이념은 17세기 후반 소론의 영수 박세채(1631~1695)가 구체화했습니다.
“황극의 도는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 같이 크고…마치 북극성(임금)을 여러 별이 옹위하는 것처럼 서민부터 군자에 이르기까지 치우치거나 공정하지 못할 근심이 없게 됩니다.”(<숙종실록> 1683년 2월4일)
결국 박세채가 씨앗을 뿌려 영·정조 때 실행된 탕평책은 북극성과 뭇별의 관계처럼 임금이 표준을 세워 이뤄가는 이른바 ‘황극 탕평’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왕권 강화’의 방편이었습니다.
어떤 당파가 정권을 잡더라도 다른 정파의 ‘쓸만한 인물도 기용한다’는 ‘조제론’이 황극탕평의 요체라 할 수 있습니다. 약을 조제하는 이치와 같은 겁니다. 물론 약의 처방은 군주의 몫인 겁니다. 이것은 어떤 당파가 정권을 잡으면 반대당이 깡그리 일소되는 ‘환국’과는 다른 입장이죠. ‘승자독식’과 ‘패자일소’의 구태에서 벗어나야 망국적인 당파싸움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겁니다. ‘임금이 중심이 되어 화해와 공존, 경쟁’을 펼치는 정치를 추구한 겁니다.
■경종의 석연치않은 죽음에 연루?
영조의 탕평책을 보죠.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난 영조는 그와 같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올랐죠.
당시 소론은 경종(1720~1724)의 편에 서 있었고요. 노론은 경종을 압박해서 그들이 지지한 연잉군(영조)를 왕세제로 올렸습니다. 그런데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승하하는 과정에서 왕세제가 연루된 ‘시해음모설’과 ‘독살설’이 그럴싸하게 퍼집니다. 즉 왕세제(영조)가 경종의 와병 중에 상극의 음식인 게장과 생감을 올렸고, 막판에는 의사의 처방없이는 절대 같이 먹어서는 안될 인삼과 부자를 드시도록 고집했다는 겁니다. 그것도 어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1724년 8월21·24일)
왕세제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는데요. 겨우 왕대비인 인원왕후(숙종의 계비·1687~1757)와 왕세제에 우호적이었던 소론 온건파의 도움으로 겨우 왕위에 오르죠.(1724) 하지만 마지막 고비가 남아있었습니다. 영조의 정통성을 문제 삼은 이인좌(1695~1728) 등이 반란을 일으킵니다.(1728) 무려 20만명이 반란에 가담했는데요. 이 반란은 소론 온건파 오명항(1673~1728) 등의 활약으로 천신만고 끝에 진압됩니다.
■“난 게장을 올리지 않았어”
이후 영조는 상처입은 정통성 문제를 해결하고 민심을 추스르기 위해 갖가지 소통방안을 마련하는데요.
그 중 하나가 책의 편찬이었습니다. 이인좌의 난(1728)를 평정한 내용을 담은 <감란록>이 눈길을 끄는데요.
영조는 서문에서 “반란의 뿌리는 붕당에 있다”고 못박았습니다. 영조는 소론이 경종을, 노론이 왕세제(영조 자신)를 밀었기 때문에 죽기살기식 싸움이 벌어졌다는 겁니다.(<영조실록> 1729년 8월18일자) 신하가 임금 후보자를 미는 형세이니 패배자측이 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영조는 경종 승하와 관련된 각종 의혹을 강력 부인하고 당신의 입장을 밝힌 <어제대훈>을 펴냅니다. 영조는 “효종-현종-숙종의 혈통을 잇는 이는 경종과 과인(영조) 뿐이며, 신축년(1721년) 경종의 명으로 왕세제가 된 것”이라고 굳이 밝힙니다.
이어 경종독살설 관련, 최대 의혹사건인 ‘게장 사건’ 등을 해명하는 <천의소감>도 펴냈습니다. 영조는 “황형(경종)께서 드신 게장은 (과인이 아니라) 수랏간에서 올린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정통성 문제를 설득으로, 힘으로 해결한 영조는 본격적으로 ‘황극탕평’을 이뤄나가는데요.
1742년 성균관에 세운 ‘탕평비’에 ‘탕평의 의지’를 담았습니다. “두루 사귀고 치우치지 않음은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고, 치우치고 두루 사귀지 않음은 소인의 사사로운 생각”(탕평비)이라고 했죠. 성균관 유생들에게 “…만약 당을 섬기는 마음이 있다면 과거장에 들어오지 마라”(<승정원일기> 1764년 5월14일)고 재차 훈계했습니다.
■인사위원회에 참석한 정조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어땠을까요. 정조는 임금이 세운 큰 의리에 각 정파가 참여하는 이른바 ‘의리 탕평’을 펼쳐갑니다.학문이 신하들보다 뛰어난 정조는 ‘군사(君師·만백성의 어버이이자 신하들의 아버지)’를 자처했죠. 그랬기에 임금이 주도하는 ‘의리탕평’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인사행정도 온전히 왕에게 넘어갑니다.
1785년(정조9) 12월 창덕궁 중희당에서 열린 친림 도목정사를 그린 ‘을사친정계병’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도목정사(都目政事)’는 해마다 2~4차례 관리들의 인사고과를 토대로 승진·삭탈·자리 이동 등을 결정하는 일종의 인사위원회입니다.
그림을 보면 ‘인사위’에 참석한 정조가 인사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어좌 앞에 ‘3배수 후보자 명단(망단자)’이 보이고요. 임명장에 찍을 옥새가 전각 밖 붉은 탁자 위에 놓여있습니다.
특히 규장각 관원의 위상이 눈에 띕니다. 규장각 관원이 승지들과 함께 내시와 사관 다음에 앉아 있습니다. 인사행정 담당인 이조와 병조 당상은 툇마루에, 이조와 병조낭관은 전각 밖에 있는데 말이죠. 정조가 규장각 관원 등 측근세력을 기반으로 왕권 강화를 모색했음을 알 수 있는 그림입니다.
■생각없는 늙은이 같으니…
이번 특별전에서 정조는 즉위 300주년을 맞이한 영조에 주연자리를 비워주고 ‘주조연’으로 내려 앉아야겠죠.
그래도 신하들과 격의없이 주고받은 편지정치와 관련해서는 그냥 넘길 수가 없겠습니다.
정조가 재상인 심환지(1730~1802)에게 보낸 편지가 특히 눈에 띄는데요. 심환지는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1735~1762)의 죽임이 정당했다고 주장한 노론 벽파의 영수였죠. 그래서 정조와 대립각을 세운 인물로 알려졌는데요.
그런데 2009년 정조와 심환지 사이에 주고받는 내밀한 편지가 공개되었답니다. 이 중 정조가 심환지에게 “사직상소를 올리라”는 사주하는 편지가 눈길을 끕니다. 그중 1798년(정조 22) 1월11일 밤에 보낸 편지를 볼까요.
“경의 본직은 함께 물러난다는 의리로 사퇴명분을 삼는게 좋겠다. 내일 안으로 사직하고 임금의 답을 기다려라….”
정조의 편지에 따라 이틀 뒤(13일) 심환지가 사직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짐짓 “함께 물러나겠다고 경이 고집하는데 옳지는 않지만 허락하겠다”고 사표를 수리해버립니다. 또 1798년 4월6일 편지에서는 “…계속 궁궐에 들어오라는 임금의 명을 어기도록 하라. 사직상소는 초고를 지은 뒤 반드시 보여주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결국 심환지는 임금의 명에 따라 4번이나 “궁궐에 들어오라”는 명을 어겼고요. 미리 사직상소의 초고까지 본 정조는 편지의 각본대로 심환지를 해임했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정조는 ‘비밀편지’에서 육두문자에 가까운 거친 언사로 심환지를 다그치는데요.
“나는 경(심환지)을 이처럼 격의없이 여기는데 경은 갈수록 입조심 하지 않는다. ‘이 떡이나 먹고 말 좀 전하지 마라’는 속담을 명심하라. 매양 입조심 하지 않으니 경은 생각없는 늙은이(無算之수)라 하겠다.”(1797년 4월10일)
이밖에 “과연 어떤 놈들이기에 감히 주둥아리를 놀리는가(乃敢鼓吻耶)”라든지 “이 사람은 참으로 호로자식이라 하겠다.(可謂眞胡種子)”는 등의 욕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47세의 정조가 69세의 노재상을 쥐락펴락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엔 왜 그리 당명이 많은가”
이번 특별전을 보면서 한가지 드는 근본적인 의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정조의 탕평책으로 조선이 확 바뀌었을까요?
1772년이면 영조가 즉위한지 48년이 지난 때였는데요. 그런데 영조는 당파를 개탄하는 포고문을 발표합니다.(8월11일)
“아! 50년 동안 한결같은 마음은 탕평인데…우리나라의 당명은 어찌 그리 많은가? 처음에는 동서가 있었고, 다음엔 대북·소북이 있었으며, 또 남서가 있었는데, 그것도 부족해서 다시 노론·소론이라 하고, 지금은 청(淸)·명(名)이라 한다.”
그보다 15년전인 1755년(영조 31) 영조를 극렬하게 비난하는 내용을 걸리거나(나주 벽서사건), 그런 내용을 답안지로 제출한(과거시험장 사건) 등이 일어났는데요. 영조는 ‘이인좌의 잔적’이라면서 소론 500여명을 소탕했습니다.
그러고보면 영·정조의 탕평책은 붕당 정치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이 아니고요. 강력한 왕권으로 정파간의 극렬한 다툼을 억누른 것에 불과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하고 순조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왕권이 약화하자 곧 세도정치라는 더욱 파행적인 정치 형태를 낳게 되었다는 겁니다.
■“뜻은 이뤄진다”
그렇다고 ‘탕탕평평’을 너무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왕권강화든 뭐든 백성들의 삶에 보탬이 되면 그것은 업적이 아닙니까. 탕평으로 붕당의 갈등을 줄인 영조는 백성의 삶을 보듬는 정책을 펼쳤죠. 그 분의 가장 큰 업적은 균역법이었습니다. 1751년(영조 27) 양인(16~60세)이 군복무 대신 부담해야 할 세금을 포 2필에서 1필로 감해준 겁니다. 짓눌린 백성들의 어깨를 한결 덜어줬죠.
또한 준천, 즉 하천 정비작업도 펼쳤습니다.(1760) 정비된 지 오래되어 물 흐름이 막히거나 넘치는 일이 번번했던 서울의 하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였죠. 여러차례 현장지도에 나선 영조는 공역이 마무리 된 후 <준천첩>을 만들어 신하들에게 배포했습니다. 이 첩에는 ‘뜻이 있으면 마침내 이뤄진다(有志竟成)’이라는 고사가 담여있습니다. ‘꿈은 이뤄진다’는 2002년 월드컵 구호가 연상되죠. 영조가 <서경>과 <시경>의 구절을 인용하며 쓰고 그린 바위그림이 심금을 울립니다.
‘유석암암(維石巖巖)은 <시경>에 실려있다네(詩經攸載)’, ‘고외민암(顧畏民巖)은 <서경>의 훈계라네(書傳訓戒)’라는 글귀를 담은 그림인데요. ‘유석암암’은 <시경> ‘절남산’, ‘고외민암’은 <서경> ‘소고’의 구절입니다. 요컨대 이런 내용입니다.
“한쪽으로 치우쳐 백성을 돌보지 못하면 안되네.(유석암암)”
“백성의 어려움을 돌아보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네.(고외민암)”
영·정조의 ‘탕탕평평’은 기본적으로 백성을 향한 마음씨의 발로였다는 사실만큼은 잊지말아야 할 것 같아요.
(이 기사를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의 이수경 학예연구관·허문행 학예연구사가 자료와 도움말을 주었습니다. 이근호 충남대 국사학과 교수와 이정은 국립해양박물관 선임학예사가 자문을 해주었습니다.)
<참고자료>
이수경·허문행·명세라·이현숙, <탕탕평평-글과 그림의 힘>(특별전 도록), 국립중앙박물관, 2023
이근호, <조선후기 탕평파와 국정운영>, 민속원, 2016
이근호, ‘영조대 탕평파의 국정운영론 연구’, 국민대 박사논문, 2002
김영진·박철상·백승호, ‘정조의 장서인’, <규장각> 45집,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15
이정은, ‘영조 어제로 본 김두량 삽살개 연구’, <문물연구> 30권 30호, 동아시아문물연구학술재단, 2016
백승호·장유승·박철상·진재교·안대회·이상하·김문식·임형택, <정조어찰집>, 성균관대 출판부, 2009
히스토리텔러 기자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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