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탈불급과 묘서동처[전성인의 난세직필](21)
2022년 3월 윤석열 정부가 출범했을 때 나름 기대를 건 사람도 많았다. 선망의 대상인 서울대학교 법학과에서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이 대통령이 됐고, 주변에는 서울대 법학과와 경제학과 출신의 잘난 사람들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특수통 에이스였고, 경제관료로 거론되던 추경호, 최상목, 임종용 씨들도 모두 족탈불급(足脫不及)의 인재로 평가받았다. 서울대 경제학과에 이어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한덕수 국무총리와 이창용 한은 총재도 화려한 이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족탈불급의 에이스들이 필부의 한계를 드러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22년 8월 31일에 나온 론스타 판결이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대한민국 정부가(즉 우리 국민이) 론스타에 약 3000억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중재판정부 판정의 원인 제공자들과 이에 대해 수사를 했던 담당자들이 모두 윤석열 정부에 몸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묘서동처(猫鼠同處)가 따로 없었다. 원인 제공자의 반열에는 한덕수 총리, 추경호 부총리, 김주현 금융위원장, 이창용 한은 총재가 직접 혹은 간접적 이유로 이름이 오르내렸고, 당시 수사 담당자로는 윤석열 대통령, 한동훈 법무부 장관,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등이 있었다.
이때 윤 대통령은 선택할 수 있었다. 묘서동처를 청산하고 한동훈 장관과 이복현 원장을 동원해서 론스타 사건의 진상을 수사하고 위법행위자를 사법처리하거나 적어도 공직에서 사퇴시킬 수 있었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못할 것도 없는 일이다. 윤 대통령은 이들에게 적어도 눈에 보이는 빚은 없었기 때문이다. 국정을 운영할 에이스들이 없어진다고? 걱정할 필요조차 없다. 이들과 엇비슷한 능력을 가진 인재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그러나 이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론스타가 금융규제라는 게임의 룰을 위반하는 것을 돕거나 눈감은 자들에 대해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정권이 면죄부를 준 것이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이때부터 윤석열 정부에는 시장경제니, 자유니 하는 고상한 원칙이나 철학이 자리 잡을 여지가 사라지게 됐다. 2022년은 그렇게 비틀어진 채 막을 내렸다.
그리고 2023년이 왔다. 올해는 거추장스러운 고상한 원칙은 과감히 생략한 채, 불문곡직(不問曲直) 성과주의가 노골적으로 판을 친 한 해였다. 시쳇말로 ‘닥치고 까라면 까’식의 경제 정책이 난무했다.
은행의 과도한 이익에 대한 정책 대응이 그 좋은 예다. 지주회사 체제 내의 거대 은행들이 대략 분기에 1조원씩 이익을 내는 현상은 이미 작년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데 올 초 은행의 작년 영업실적이 공개되고 언론이 과도한 이익을 문제 삼자 대통령이 앞장서서 반응했다. 불완전 경쟁이 문제라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적절한 정책 대응은 공정위가 나서서 시장지배적 행위의 존재 유무를 조사하는 것이지 은행 산업 전체를 완전경쟁 산업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대통령이 삐딱선을 타고 ‘완전경쟁’이라는 단어를 발설했다가 경제전문가들에게 혼쭐이 났다.
그 뒤의 수습은 소위 ‘족탈불급의 에이스’라는 금융위 관료들에게 맡겨졌다. 금융위는 챌린지 뱅크를 만들어 경쟁 압력을 강화하겠다고 입장 정리를 했다가 지향점으로 삼았던 실리콘밸리 은행이 도산하자 입을 닫았다. 그리고 근 1년을 끙끙 앓다가 최근 내놓은 결과가 지난 12월 21일에 요란하게 발표한 소위 ‘은행권의 2조원+민생금융지원방안’이었다.
이 지원방안은 멋있어 보인다고 금융위가 아무리 나팔을 불어도 잘못된 것이다. 그냥 ‘까라면 까’식의 은행 팔 비틀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왜 그런가?
우선, 은행이 무슨 논리로 주주에게 돌아가야 할 당기순이익의 일부를 다른 사람에게 그냥 주는가? 이것은 은행이 결정할 일이 아니라 주주가 결정할 문제다. 은행의 대표이사가 맘대로 결정하면 업무상 배임의 소지가 크다(아마 팔을 심하게 비틀리지 않았다면 은행들은 필시 이런 논리로 이번 방안을 거부했을 것이다).
둘째, 사회공헌 차원에서 은행이 주주들에게 물어보지 않고도 이 정도 액수는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재량을 가지고 있다고 하자. 그럼 누구를 도와주어야 하는가? 당연히 어려운 사람들일 것이다. 그럼 누가 어려운 사람들인가? 은행 대출 이자를 꼬박꼬박 갚은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들인가, 아니면 은행 대출 이자를 연체하거나 부도를 낸 사람들인가? 당연히 연체 혹은 부도를 낸 사람들일 것이다. 따라서 은행이 지원한다면 마땅히 가장 어려운 사람들인 연체자나 부도자 혹은 부도 예상자들을 도와줘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사람들에게 채무재조정을 해주고 원금 또는 이자를 탕감해 주는 것이 돕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번 방안은 꼬박꼬박 이자를 갚은 사람들을 돕겠다는 것이다. 아니 왜?
이게 소위 족탈불급의 에이스라고 자부하는 금융위 관료들의 작품이다. 내용도 한심하고 원칙도 엉망이고 정책 효과도 핀트가 어긋났다.
족탈불급의 허상은 그렇다고 하고 그럼 묘서동처의 어색함은 사라졌는가? 아니다. 오히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더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 핵심은 윤석열 정부와 재벌 총수 간의 ‘급속한 거리 좁히기’다. 삼성 이재용 회장의 ‘경영권 불법 승계’ 사건을 보자. 구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의 부당합병에 대한 1심 재판에서 검찰은 지난 11월 17일 징역 5년과 벌금 5억원을 구형했다. 이 사건은 윤 대통령이 검찰총장 시절 기소가 이루어졌고,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담당 검사로서 기소와 공판을 담당해왔던 사건이다.
그런데 최근 윤 대통령과 이재용 회장은 여러 곳에서 ‘떡볶이 먹방’과 ‘조촐한 소맥 파티’를 시전하고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윤 대통령은 이재용 국정농단 사건 제2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했던 1심을 깨고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한 정형식 대전고등법원장을 신임 헌법재판관으로 추천하고 임명했다(참고로 대법원은 정형식 판사의 2심 판결을 전부 파기하고 사건을 되돌려 보냈다). 범죄혐의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기소하던 윤석열 검찰총장의 모습은 이제 어디서도 찾기 어렵게 됐다.
2023년은 또 이렇게 비틀리면서 저물었다. 내년에는 묘서동처를 청산하고 공명정대한 세상이 올 것인가? 비관적이다. 한 해가 저무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저물고 있는 것 같아 속이 헛헛하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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