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無知지옥] 저축으로 재산 불리는 시기 끝났다…호모‘투자’쿠스의 시대
청년의 주식·코인 투자는 필연적 결과
실전으로 배운 탓에 20·30 개인 회생 증가 추세
곗돈과 은행 적금이 전부였던 시절도 있었으나 지금은 스마트폰을 활용한 주식, 가상화폐 매매 등 투자처가 다양해졌다. 그만큼 금융 소비자들의 인식도 바뀌어야 하지만,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정신이 바뀌지 않았다. 돈을 다루는 장사를 가장 천한 직업으로 여기는 탓에 그간 우리 사회에서 돈에 대한 얘기는 금기시됐고 금융 교육이 전무했다. 그 결과 3대 사모펀드(라임·옵티머스·디스커버리) 및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불완전판매 논란, 라덕연 사태가 터졌다. 반복되는 금융 사고를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짚어봤다. [편집자주]
“금리가 쪼까 떨어져서 15%밖에 안 하지만 따박따박 이자 나오고 은행만큼 안전한 곳이 없제.”
1988년을 배경으로 한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성동일은 갑작스러운 목돈이 생긴 지인에게 저금을 추천했다. ‘떨어진’ 금리가 연 15%라는 점, 성동일의 말을 듣고 라미란이 “은행 이자 얼마나 된다고”라고 타박한 점은 시청자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방영 당시 기준금리가 1%대였기 때문이다.
과거 은행 예·적금은 대표적인 자산 증식 수단이었다. 현재는 우리은행에 흡수된 한일은행은 1979년 1년짜리 ‘목돈마련저축’에 연 23.4%의 이자를 지급했다. 목돈마련저축은 근로자가 소득의 일부를 저축하면 이들이 재산을 마련할 수 있도록 정부·금융 기관·사업주 등이 지원하는 근로자재산형성저축(재형저축)이다.
당시 1만원씩 저축했다면 1년 후 만기 때엔 이자를 포함해 13만5180원을 손에 쥘 수 있었다. 4년만 있어도 원금의 2배를 불릴 수 있었던 셈이다. 저금만 해도 집도, 차도 살 수 있었던 시대는 1990년대까지 지속됐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기준금리는 5%대로 떨어졌다. 그 이후로 계속 떨어져 코로나19 당시엔 0%대까지 금리를 낮췄다. 기준금리에 연동된 은행 예·적금 이자도 적어졌다. 2020년 1월 저축은행의 정기 예금의 평균 이자는 연 2.12%였다. 물가 상승률을 고려하면 예금에 가입하면 자산의 실제 가치가 깎인 것이다.
동학 개미 운동이 이 시기에 번진 것도 우연이 아니다. 저축만으로 살림 밑천을 마련했던 부모 세대와 달리 부지런히 투자하지 않으면 ‘벼락 거지’가 되기에 수많은 청년이 주식 시장에 뛰어들었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30대 미만 개인 주식 소유자는 2019년 48만522명이었으나, 지난해 말 255만6695명으로 늘었다. 3년 만에 청년 투자자가 5배 증가했다. 전체 투자자에서 차지하는 비중 역시 같은 기간 7.8%에서 18.0%로 늘었다. 동학 개미 운동에 그 누구보다 청년층이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점이 드러난 것이다.
주식에도 만족하지 못한 이들은 더 위험한 가상자산으로 눈을 돌렸다. 하루에 오를 수 있는 폭이 30%로 제한된 주식과 달리 가상자산은 가격 규제가 없다. 실체도 없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전 국장인 존 리드 스타크가 “(가상자산은) 현금 흐름도, 수익도, 대차대조표도,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 것도 그 이유다.
가상자산 투자로 쉽게 돈을 번 이들은 기존의 금융상품에 만족하지 못한다. 한 시중은행 프라이빗뱅커(PB)는 “25살 고객에게 금융 상품을 몇 가지 추천했는데 ‘연 10%도 안 되는 수익률은 너무 적은 것 아니냐’라고 했다”며 “그 고객은 2년 동안 코인(가상자산)과 주식으로 200만%의 수익률을 올렸다”고 했다. 가상자산으로 재미를 본 이들이 점차 더 위험한 투자처로 뛰어드는 셈이다. 금융위원회 조사 결과 지난해 말 기준 가상자산 투자자 2명 중 1명은 20대 이하와 30대(51%)였다.
현재의 청년층은 투자를 공교육이 아닌 주식과 가상자산 등 실전으로 배웠다. 그렇다 보니 실패도 잦다. 이를 엿볼 수 있는 청년층의 개인 회생 신청 건수는 점차 증가 중이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2021년과 2022년 20·30대의 개인회생 신청 건수는 차례로 3만6248건, 4만494건이었는데 올해는 상반기에만 2만5244건이 집계됐다.
제대로 된 교육 없이 위험한 투자에 뛰어들고, 일확천금을 노리다가 금융 사기 피해자가 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주식 공부를 시작해 현재는 자산운용사를 설립한 이창환 얼라인파트너스 대표는“투자자가 금융을 배우지 않으면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잘못된 투자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크다”라며 “금융 교육은 생존이 달린 문제로 삶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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