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 경제성장의 아버지’는 왜 성탄절만 되면 트리에 묻힐까
23일(현지 시각) 아르헨티나 남서부 휴양도시 바릴로체 도심 광장. 성탄절을 앞두고 설치된 하얀색 대형 크리스마스트리 조형물 앞에서 관광객·시민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었다. 스위스풍 건축물과 빼어난 자연 경관 때문에 ‘남미의 스위스’라 불리는 이곳에 크리스마스트리가 설치된 것이 낯선 풍경은 아니지만, 트리 안에 숨겨진 동상이 최근 과거사(史) 논쟁의 중심에 섰다.
동상의 주인공은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1843~1914) 전 대통령이다. 9대(1880~1886년)·14대(1898~1904년) 대통령을 지낸 육군 장성 출신 로카는 12년 동안 재임하면서 해외 투자를 적극 유치하고 사회 기반 시설을 확충, 아르헨티나를 한때 세계 5대 경제 대국으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영토를 확장하고 국민 교육을 강화하는 등 강대국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공로도 인정받는다.
하지만 영토 확장 과정에서 원주민 수천 명을 학살했고 민주적 선거 개혁을 가로막았다는 비판도 받는다. 좌파 페로니스트(대중 영합주의자) 정권이 집권한 지난 수십 년간 그의 경제 성과보다 과오가 부각됐다. 특히 과거 로카 정권의 원주민 학살 피해를 받은 지역 가운데 하나인 바릴로체에서는 낙서나 페인트 투척 등 로카 동상 훼손 사고가 잇따랐다. 이에 바릴로체시 당국은 2013년부터 매년 12월 성탄절을 전후해 로카 동상을 트리 조형물로 덮어 왔다. 전직 대통령의 동상을 완전히 가리는 것은 지나친 처사라는 비판도 나왔다. 시 당국은 올해 들어 동상을 도심 광장에서 철거해 시 외곽으로 옮기려 했지만, 법원이 제동을 걸었다.
극우 경제학자 출신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이 지난 10일 취임하면서 ‘로카 논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밀레이는 취임사에서 “자유와 민족에 관한 한 최선의 노력과 고통스러운 희생 없이는 어떤 위대함도, 지속적 안정도 성취할 수 없다”는 로카의 과거 발언을 인용하며, 로카를 “아르헨티나 역사상 최고의 대통령”이라고 추켜세웠다. 최근 취임한 신임 바릴로체 시장도 “내년부터는 로카 동상을 크리스마스트리로 덮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동상 존치 문제를 포함해 로카 전 대통령을 둘러싼 과거사 논란이 증폭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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