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현의 끼니] 막국수의 계절

박상현 맛칼럼니스트 2023. 12. 2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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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는 모밀내가 났다. 부처를 위하는 정갈한 노친네의 내음새 같은 모밀내가 났다'.

시를 처음 알았을 당시에는 '메밀내'도 몰랐고 '부처를 위하는 정갈한 노친네'의 내음새도 몰랐기 때문이다.

수백 그릇의 냉면과 막국수를 먹고 지천명에 이르니 비로소 시인의 왼쪽 새끼발가락 만큼의 감성이 돋아났다.

들기름막국수, 물막국수 순으로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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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는 모밀내가 났다. 부처를 위하는 정갈한 노친네의 내음새 같은 모밀내가 났다’.

백석의 시 ‘북신’의 첫 구절이다. 나는 이 두 문장의 심상을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를 처음 알았을 당시에는 ‘메밀내’도 몰랐고 ‘부처를 위하는 정갈한 노친네’의 내음새도 몰랐기 때문이다. 수백 그릇의 냉면과 막국수를 먹고 지천명에 이르니 비로소 시인의 왼쪽 새끼발가락 만큼의 감성이 돋아났다.

경기 용인시 ‘고기리막국수’.


사람들은 구불구불한 외길을 따라 한사코 계곡을 거슬러 올랐다. 그것은 마치 구원을 바라는 신도들의 행렬 같았다. 절집이 있어 마땅한 자리에 국수집이 들어앉았다. 국수집에 도착한 신도들에겐 또 다른 고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국수집 입장이 허락될 때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그들은 추위에 오돌오돌 떨면서 자신이 호명되는 순간을 고대하고 있었다.

이것은 소위 ‘맛집’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곳곳에서 횡행하는 신흥종교가 분명했다. 혼란스러운 시절이다. 이윽고 내 차례가 되었다. 국수집 내부는 제법 분주하고 살짝 상기된 분위기였다.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고요했다. 처음 방문한 나는 이곳을 거쳐 간 수 많은 신도들의 전통을 따르기로 했다. 들기름막국수, 물막국수 순으로 시켰다.

나는 들기름막국수 한 젓가락에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금방 짜낸 듯 신선하고 고소한 들기름의 향에 메밀향이 전혀 밀리지 않았다. 메밀국수는 오히려 들기름 김가루 참깨를 여유있게 갖고 놀았다. 들기름 김가루 참깨가 어디 가서 향으로 밀릴 애들이 아니다. 그런데 이들과 3:1로 맞짱 떠도 밀리지 않는 메밀국수라니! 나는 국수 앞에서 한없이 초라하고 겸손해졌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이번에는 물막국수로 젓가락을 옮겼다.

이 국수집이 왜 중원을 마다하고 이런 골짜기에 터를 잡았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그것은 절대 고수만 가질 수 있는 겸손과 여유, 그리고 자신감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기꺼이 이 국수집의 신도가 되기로 결심했다. 세상 모든 곡물은 밥임과 동시에 씨앗이다. 두 역할 모두 생명의 근원이다. 하여 조물주는 곡물에게 한 가지 은혜를 베풀었다. 겉껍질로 하여금 곡물을 보호하도록 했다. 그래서 곡물은 반듯하고 때깔이 고와야 좋은 것이다. 자연의 섭리다. 하지만 인간의 문명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곡물이 밥이 되고 면이 되려면 겉껍질을 제거해야만 했다. 조물주가 관장하는 일은 여간 꼼꼼하지 않아 인간은 곡물의 겉껍질을 벗기는 일에 수천 년을 허비했다. 인간은 결국 이 난제를 풀었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숙제가 있다.

인간이 밥을 얻으면 씨앗은 생명을 잃는다. 그와 동시에 생명이 품고 있던 모든 에너지가 소멸한다. 가장 먼저 소멸하는 것이 향이다. 그래서 굳이 따지자면 막국수의 제철은 햇메밀이 나왔을 때다. 그윽하고 순정한 메밀의 향이 가장 강할 때가 메밀국수를 먹을 적기다. 바로 지금이다.


메밀의 향은 인간의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인간이 메밀의 사정을 좇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미루지 말고, 바로 지금 당장 막국수집으로 향해야 한다.

그럼 당신도 백석이 맡았던 그 모밀 내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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