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333> 한해의 끄트머리에 은거하는 삶을 읊은 조선 후기 임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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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벽한 곳이지만 무슨 일인들 정진하지 못할까(窮居何事不淸眞·궁거하사불청진)/ 한해의 마지막에 술병만 늙은이와 짝하네.
/ 적막한 게 점점 좋아지니 시은이 다 돼(漸喜寂寥成市隱·점희적요성시은)/ 느긋하다 조롱하지 말라, 우리 집 빈한하네.
이듬해에도 김중하에 대해 논계(論啓)를 정지했다는 일로 대사헌 유하익 등에게 논핵 당하자 경기도 광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필자도 은거하러 들어왔지만 지리산 곳곳에 '시은(市隱)'하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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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벽한 곳이지만 무슨 일인들 정진하지 못할까(窮居何事不淸眞·궁거하사불청진)/ 한해의 마지막에 술병만 늙은이와 짝하네.(歲暮甁罍伴老身·세모병뢰반로신)/ 적막한 게 점점 좋아지니 시은이 다 돼(漸喜寂寥成市隱·점희적요성시은)/ 느긋하다 조롱하지 말라, 우리 집 빈한하네.(莫嘲疏緩任家貧·막조소완임가빈)/ 엄동설한에 굶주린 닭은 모이 찾지 못하고(鷄飢雪凍難尋粒·계기설동난심립)/ 추운 날씨에 병든 말은 땔감 운반 못 하네.(馬病天寒叵運薪·마병천한파운신)/ 해가 길어져 얼음 다 녹기를 기다렸다가(會待日長氷泮盡·회대일장빙반진)/ 봄에 낚싯대 하나 매고 야외 못에 가리라.(一竿歸及野塘春·일간귀급야당춘)
위 시는 조선 후기 문사인 염헌(恬軒) 임상원(任相元·1638~1697)의 시 ‘세모(歲暮)’로, 그의 문집인 ‘염헌집(恬軒集)’에 실려 있다. 그는 1688년(숙종14) 친분관계가 있던 남구만 등이 견책당했을 때 도승지로서 제대로 집행하지 않았다는 혐의로 장단 부사로 좌천됐다. 이듬해에도 김중하에 대해 논계(論啓)를 정지했다는 일로 대사헌 유하익 등에게 논핵 당하자 경기도 광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위 시는 그곳에서 1691년(숙종17) 지었다.
수련에서 시인은 정치논리가 앞서던 서울에서 벗어나 세상 인연 끊고 사니 마음이 깨끗해졌다고 한다. 나라의 녹을 받지 않으니 당연 가난하다. 닭들도 모이를 찾지 못하고, 말도 먹은 게 없어 땔감을 나를 힘이 없다. 이런 상황인데도 시인은 봄이 와 얼음 녹으면 못에 가 낚시하고 오겠다고 한다.
시인이 언급한 ‘시은(市隱)’은 속세와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자유를 누리는 은자를 말한다. ‘논어’ 선진(先進)편에서 공자의 제자 증석이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겠다”고 말하였다. 이는 증석이 난세 이후의 삶을 제시한 것이다.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는 증석과 봄이 돼 낚시하러 가는 시인의 모습이 겹치지 않는가. 추워 모든 게 얼어붙은 지리산에서 2023년 끝자락에 위 시를 읽었다. 필자도 은거하러 들어왔지만 지리산 곳곳에 ‘시은(市隱)’하는 사람이 있다. 골짝마다 숨어 지내기 좋은 곳이 많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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