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 폐단 없애자” 체찰사 이원익과 한뜻…장병 위한 잔치도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 2023. 12. 25.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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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역(意譯) 난중일기-이순신 깊이 읽기 <37> 을미년(1595년) 8월 11일~9월 6일

- 새로 부임 이원익 한산진영 방문
- 백성 고통 덜어줄 방안 머리 맞대
- 망산 정상 올라가 적진 등 살펴

- 추석회식으로 술 취해 밤 새운 날
- 詩‘한산섬 달 밝은 밤…’ 창작 추정

8월11일[9월14일]

비가 오다 개다 했다. 종 한경이 본영으로 갔다. 배영수와 김응겸이 활쏘기를 겨루었는데 김응겸이 이겼다.

1595년 8월 27일 일기에는 이순신 장군이 체찰사 이원익과 함께 ‘한산도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망산)에 오른 기록이 나온다. 사진은 한산도 역사길 탐방로 중 망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한려수도 전경이다. 한려해상국립공원 동부사무소 제공


8월12일[9월15일] 흐림.

일찍 나가 공무를 봤다. 늦게 두 조방장과 함께 활을 쏘았다. 김응겸이 경상수사에게 갔다가 돌아와 말하기를 “우수사(이억기)에게 가서 활쏘기를 겨루었는데, 배영수가 또 졌다”고 했다.

8월13일[9월16일]

종일 비가 왔다. 장계를 쓰고 공문을 처결해 보냈다. 독수(禿水)가 왔는데, 그 편에 이기남의 도양장(고흥군 도양면) 둔전하는 일에 관해 들었다. 이기남이 하는 일에 괴이한 점이 많아 보여 우후더러 달려가서 조사해보라고 공문을 보냈다.

8월14일[9월17일]

종일 비가 왔다. 전 진해현감 정항 및 조계종(영등포만호)이 와서 이야기했다.

8월15일[9월18일]

새벽에 망궐례를 올렸다. 우수사 가리포첨사 임치현감 등 여러 장수들이 모두 모였다. 이날 삼도의 사수(射手)와 본도의 잡색군에게 음식을 풀어 먹이고, 종일 여러 장수들과 같이 취했다. 이날 밤 구름사이로 달빛이 새어 수루를 비추는데, 침상에 누워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피리소리 듣고 시를 읊으며 긴 밤을 새웠다.

※이 날은 추석이라 여러 장병들과 어울려 회식하며 함께 취했다. 이날 읊은 시가 저 유명한 ‘한산섬 달 밝은 밤에…’의 ‘한산도가’였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

8월16일[9월19일]

체찰사로 1595년 진주와 한산도 등지를 돌아본 이원익의 초상.


궂은비가 걷히지 않고 종일 부슬부슬 내렸다. 마음이 몹시 산란했다. 두 조방장과 같이 이야기했다.

8월17일[9월20일]

가랑비가 오고 동풍이 불었다. 새벽에 김응겸을 불러 일에 대해 물어보았다. 늦게 나가 공무를 봤다. 두 조방장과 함께 이야기하고 활 10순을 쏘았다.

8월18일[9월21일]

궂은비가 걷히지 않았다. 신, 박 두 조방장이 와서 함께 이야기했다.

8월19일[9월22일]

날씨가 활짝 개었다. 두 조방장 및 방답첨사와 함께 활을 쏘았다. 밤 10시쯤에 조카 봉, 아들 회, 울이 들어왔다. 들으니, 체찰사(이원익)가 21일 진주성에 도착되는데 군무에 관해서 묻고자 군관을 보내 나를 부른다고 하였다.

**** 우의정 이원익(자는 梧里·오리)은 도체찰사가 되어 8월1일 남쪽 지방으로 와 군무를 총괄한다. 그는 태종의 아들 익령군의 고손자로 민본정책을 펴 많은 백성의 존경을 받았는데 이순신도 평소 이원익을 좋게 보았다. 그래서 그와의 첫만남에 최대의 성의를 보였고, 6일간 함께 지내며 세세하게 업무를 보고하고 민생에 관한 �萱� 의견을 나누며 의기투합 했을 것이다.

8월20일[9월23일] 맑음.

종일 체찰사의 전령을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 경상수사(권준) 우수사(이억기) 발포만호(황정록)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밤 10시쯤에 체찰사의 전령이 들어왔다. 전령을 받자 마자 바로 자정에 배를 몰아 진주성으로 향했다. 곤이도(통영시 산양읍)에 이르렀다.

8월21일[9월24일] 흐림.

늦게 소비포(고성군 하일면 춘암리) 앞바다에 이르니 전라순찰사(홍세공)의 군관 이준이 공문을 가지고 왔다. 강응표와 오계성이 같이 와서 한참동안 이야기했다. 경수(이억기의 字), 언경(권준의 字), 자윤(박종남의 字), 언원(신호의 字)에게 편지를 썼다. 저물 무렵에 사천 땅 침도(針島:삼천포 신수동)에 배를 대고 잤다. 밤기운이 몹시 차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 수사들과 조방장들에게 보낸 편지는, 한밤에 갑자기 출발했기 때문에 그 사정을 설명해주고 통제사 부재에 따른 몇 가지 부탁을 하는 편지였을 것이다.

8월22일[9월25일] 맑음.

이른 아침에 여러가지 공문을 만들어 체찰사에게 보냈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출발해 사천현을 지나 오후에 진주 남강가에 당도하였다. 체찰사는 벌써 진주에 들어왔다고 했다.

8월23일[9월26일] 맑음.

체찰사 있는 곳으로 가서 조용히 이야기했다. 이야기하는 중에 체찰사는 백성을 위해서 폐단을 없애고 고통을 덜어주어야한다는 생각을 많이 말했다. 그 말들을 하는 중에 호남순찰사가 나를 많이 헐뜯어 말한 듯한 기색이 엿보였다. 한심스럽다. 늦게 진주에서 전쟁으로 죽은 장수와 병사의 위령제를 지낸다는 말을 듣고 나는 김응서와 같이 촉석루에 이르러 우리 군사들이 패전하여 죽은 곳을 살펴보고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얼마 뒤에 체찰사가 나더러 먼저 소비포에 가 있으라고 하므로 나는 분부에 따라 배를 타고 소비포로 돌아와 정박했다.

8월24일[9월27일] 맑음.

새벽에 소비포 앞에 닿으니 고성현령 조응도가 와서 인사했다. 그대로 소비포 앞바다에서 잤다. 체찰사와 부사(김륵), 종사관(남이공)도 소비포로 와서 잤다.

8월25일[9월28일] 맑음.

일찍이 식사를 한 뒤에 체찰사와 부사 그리고 종사관은 내가 탄 배에 같이 탔다. 오전 8시쯤에 소비포를 출항하여, 여러 섬들을 지나면서 진을 합병할 곳과, 또 전일 접전하던 곳 등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면서 하루종일 이야기했다. 곡포(남해군 이동면 화계리)는 평산포(남면 평산리)에 합하고, 상주포(상주면 상주리)는 미조항(삼동면 미조리)에 합하고, 적량(창선면 진동리)은 삼천진(삼천포시)에 합하고 소비포는 사량(통영시 사량면)에 합하고, 가배량(거제도 도산면 노전동)은 당포(통영시 산양면 삼덕리)에 합하고, 지세포(일운면 지세포리)는 조라포(일운면 구조라리)에 합하고, 제포(진해시 제덕동)는 웅천에 합하고, 율포(거제군 장목면 대금리)는 옥포에 합하고, 안골포(진해시 안골동)는 가덕진에 합치기로 결정을 지었다. 저녁에 한산도 진중에 도착했다.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고 체찰사에게 공·사 간의 인사들 드린 후 헤어졌다.

8월26일[9월29일] 맑음.

저녁에 부사(김륵)와 서로 만나 조용히 이야기했다.

8월27일[9월30일] 맑음.

체찰사의 이름으로 군사 5480명에게 밥을 먹였다. 저녁에 체찰사와 함께 한산도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한산도 망산)에 올라가 적이 진친 곳과 적이 다니는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바람이 몹시 사납게 불고 어두워져 도로 내려왔다.

※이순신은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체찰사의 이름으로 부대 전 장병들에게 잔치를 베풀게 하고 밥을 먹였다. 한산 진영을 방문한 관리 중 체찰사가 가장 고위직 이었다.

8월28일[10월1일] 맑음.

이른 아침에 체찰사 및 부사, 종사관이 같이 수루 위에 앉아, 백성들에게 폐단이 되는 여러가지 점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식사를 하기도 전에 체찰사 일행은 배로 내려와 떠나갔다.

8월29일[10월2일] 맑음.

일찍 나가 공무를 보았다. 체찰사를 배웅하러 갔던 경상수사(권준)가 배웅을 마치고 돌아왔다.

을미년(1595년) 9월

이달 통제사의 일상도 다른 달과 별 다름없다. 다만 가깝던 친구 선거이(충청수사)와 작별하는 일로 그에겐 이별의 애틋한 감회가 있었을 것이다 .이 감회를 노래한 이순신의 시는 친구와의 헤어짐을 노래하는 시로서 오늘도 회자되고 있다. 또 한산도에 와서 지은 대청과 수루에 붙여 지은 다락방이 불타버려 시급히 새로 잘 곳을 마련해야 했던 일을 생각하면 눈물겹다.

9월1일[10월3일] 맑음.

새벽에 망궐례를 올렸다. 탐후선이 들어왔다. 우후가 도양장에 갔다 와서 공문을 작성해 바치는데(8월 13일 일기 참조), 그 속에 괜히 정사립을 해치려는 뜻이 많이 있으니 우습다. 종사관(유공진)이 병가를 내고 조리하겠다고 하므로 결재해 주었다.

9월2일[10월4일] 맑음.

새벽에 지휘선을 출항시켰다. 재목을 끌어내릴 군사 1283명에게 밥을 지어 먹이면서, 재목을 끌어내리게 했다. 충청수사 우수사 경상수사와 두 조방장이 함께 와서 종일 이야기하고서 헤어졌다.

9월3일[10월5일] 맑음.

동풍이 크게 불었다. 아우 여필과 아들 울과 유헌이 돌아갔다. 강응호가 도양장에서 가을추수를 하기 위해 함께 나갔다. 정항, 우수, 이섬이 정탐하고 들어와서, 영등포에 있는 적들은 2일부터 소굴을 비우고, 지어 놓은 누각들은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고 했다. 웅천 사람으로 왜적에게 붙어 살던 공수복 등 17명을 달래어 데려왔다고 한다.

9월4일[10월6일] 맑음.

경상수사가 와서 종일 이야기하고 돌아갔다. 아우 여필, 아들 울 등이 어떻게 잘 갔는지 알 수 없어 몹시 궁금하다.

9월5일[10월7일] 맑음.

아침에 경상수사 권준이 쇠고기를 조금 보내주어서 충청수사(선거이)와 조방장(신호)과 같이 아침식사를 했다. 식후 신 조방장, 선수사와 함께 같은 배로 경상수사가 있는 곳으로 가서 종일 이야기하고 저물어서야 돌아왔다. 이 날 체찰사의 공문이 왔는데, 순천 광양 낙안 흥양의 갑오년(1594)의 전세(田稅)를 실어 오라는 것이었다. 곧 답장을 했다.

9월6일[10월8일]

맑았으나 바람이 크게 불었다. 충청수사가 술을 내놓으므로 우수사와 두 조방장이 와서 같이 마셨다. 송덕일이 들어왔다.

※ ㈔부산여해재단·국제신문 공동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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