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더라도 세계 강국들과 부딪혀야 ‘빌드업’이 된다

강호철 스포츠부 선임기자 2023. 12. 25.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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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철의 스포트S라이트] 정몽원 HL그룹 회장
너희들은 힘차게 뻗어나가기만 하렴 - 정몽원 HL그룹 회장이 지난 20일 서울 송파구 집무실에서 하키 스틱을 들고 자세를 잡고 있다. 30년 넘게 한국 아이스하키를 아낌없이 지원한 정 회장은 하키계에선 ‘키다리 아저씨’로 통한다. /장련성 기자

지난 22일은 HL 안양 아이스하키팀 생일이었다. 29년 전인 1994년, 만도 위니아란 이름으로 탄생한 현재 국내 유일 실업 아이스하키팀. 이날 전국아이스하키종합선수권에서 연세대를 누르고 통산 13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멋진 생일 잔치였다.

구단주인 정몽원(67) HL그룹 회장은 우물안 개구리였던 국내 아이스하키를 꾸준히 국제 무대로 내민 대부(代父). 지난 20일 서울 송파구 HL그룹 사옥에서 만난 그는 “하나의 목표를 이룬 뒤 ‘그 다음은 뭘까(What is Next)’라며 꿈을 키워나간 게 지금까지 우리 팀과 한국 아이스하키를 계속 ‘빌드업(Build Up)’시켰다”며 “한국 아이스하키가 올림픽 이후 침체기에서 벗어나 강국으로 자리 잡으려면 어린 유망주가 많이 나와야 하고, 이를 위해선 그 텃밭이 되어줄 전용 링크가 선결 과제”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팀(HL 안양) 창단 30년이 되는 내년부터 국내 첫 아이스하키 전용 링크도 짓고, 축구처럼 연령별 유소년 프로그램도 제대로 가동할 생각”이라면서 “지금까지 먼 길을 지나왔지만, 앞으로 갈 길이 더 멀다”고 덧붙였다.

그의 시선은 2030년, 늦어도 2034년 동계 올림픽에서 한국 아이스하키가 다시 한번 세계 강호들과 멋지게 한판 겨뤄보는 장면에 맞춰져 있다. “지금까지 이뤘던 모든 성취는 과거로 돌리고 향후 10년 계획을 세워 다시 달릴 겁니다.”

국내 아이스링크는 전국에 40개 남짓. 일반인에게도 개방하기 때문에 초·중·고 아이스하키팀들이 대관 시간을 확보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 회장은 “아이스하키 선진국이 되려면 지도자와 저변, 유소년 프로그램, 시설, 인기가 필수 5대 요소다. 지도자와 저변은 어느 정도 마련됐고, 시설과 유소년 프로그램을 갖추면 인기는 자동적으로 높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HL 안양 측은 이미 일본 팀들 신설 링크를 둘러봤고, 국내 후보지 3곳을 놓고 검토 중인 단계다. 부지만 확정되면 그때부터 2년 후 아이스하키인들이 꿈꾸는 3000~5000석 규모의 전용 링크가 세워질 수 있다고 한다. 정 회장은 “평창 때는 귀화 선수들 역할이 컸지만, 이번에는 오로지 국내 선수들 힘만으로 빠르면 2030년, 늦게는 2034년 올림픽 빙판을 밟고 싶다”고 말했다.

“팀 창단 후 3년 만에 IMF 금융 위기 때문에 회사가 정말 어려웠어요. 그런데 그때 아이스하키팀이 코리아 리그에서 처음 우승했죠. 가라앉은 회사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역할을 아이스하키팀이 해줬어요. 그때부터 이건 내 인생이다, 반드시 지켜야겠다고 생각했죠. 마침 회사가 어려움을 잘 극복해 지금까지 같이 가고 있어요.”

이후 국내 최강자가 된 HL 안양은 다음 목표를 아시아 리그 우승으로 정했고, 2003년 리그 창설 후 치른 첫 경기에서 일본 팀에 1대11로 대패하는 망신을 겪다가 2010년 정상에 등극했다. 정 회장은 아시아 리그 최강자로 발돋움한 뒤엔 평창 올림픽 개최와 맞물려 직접 협회장을 맡아 대표팀 전력 강화에 주력했고, 평창 올림픽 자력 진출과 세계 최강국과 겨루는 세계선수권 톱 디비전 무대까지 서는 감격을 누렸다.

“매번 빌드업에 성공할 때마다 너무 기뻤죠. 하지만 그때마다 목표를 새롭게 세우고 도전하면서 하늘 위에 또 다른 하늘이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때는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7번 모두 졌죠. 당시엔 화가 났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세계 최강들과 겨뤘던 그때 순간순간이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아요.”

정 회장은 평창 동계 올림픽 성공적 개최와 남자 아이스하키의 성과를 인정받아 IIHF(국제아이스하키연맹)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 참석하려고 핀란드행 비행기를 탔는데, 현지 여승무원이 ‘한국도 아이스하키를 하느냐’고 묻더군요. 그때 한 방 맞았어요. 올림픽도 열고 세계 랭킹도 16위까지 끌어올렸는데요. 그때부터 후세를 위해 다시 한번 새로운 도전을 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한국 아이스하키계 ‘키다리 아저씨’로 통하는 정 회장은 “내년 팀 창단 30년을 기점으로 한국 아이스하키를 한 번 더 레벨 업 시키는 게 꿈”이라면서 “간절함과 절실함을 통한 끈질긴 도전 정신, 그리고 시스템의 체계적인 지원과 장기적인 계획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몽원 HL그룹 회장은 "국제아이스하키연맹 명예의 전당 헌액은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라면서 "나 혼자가 아닌 모든 아이스하키인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장련성 기자

◆정 회장의 아이스하키 희로애락

HL안양의 구단주인 정몽원 HL그룹 회장은 창단 30년째를 들어간 HL안양을 돌이커보면서 “매번 새로운 목표를 설정해 그것을 이루기 위해 도전하면서 결과를 만들어내는 순간이 가장 기뻤다”고 했다.

-아이스하키 팀을 운영하시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꼽자면 언제 였을까요.

“열심히 했는데 성적이 안 나왔을 때 아닐까요. 그리고 회사가 IMF로 힘들었을 때였던 것 같아요. 팀을 계속 운영해야 할지 말지까지 고민했으니까. 우물 안 개구리였던 우리 팀이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면서 그때마다 새로운 환경에 충격을 받고 팀이 변화할 때마다 항상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선수들도,, 나도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면서 순간 순간을 넘겼던 것 같습니다.”

-초창기 어려움 속에서도 팀을 유지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회사가 정말 어려운 상황에서 팀이 국내 리그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어요. 그게 참 위안이 됐습니다. 저와 회사가 굉장히 처져있는 상황에서 반전시키는 역할을 다름아닌 아이스하키가 해준 겁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이것은 내 인생이다 라고 생각했어요. 마침 회사가 어려운 시기를 잘 넘기고 그래서 지금까지 이렇게 같이 가고 있는 거죠.”

-가장 기뻤던 순간을 꼽는다면?

“빌드업,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릴 때마다 있었던 것 같아요. 첫 번째 빌드업이 아시아리그 우승이었어요. 가장 인상적인 경기 중 하나가 1대11로 진 아시아리그 첫 경기였어요. 일본에 아는 분들 다 오셔서 보시라고 했는데, 크게 졌어요. 몸싸움이 심해 선수도 두 명 퇴장 당했어요. 다음날 일본 신문에 ‘한국 선수들 태권도 하다’, 이런 식으로 기사가 나오기도 했어요. 망신 톡톡히 당했습니다. 그런 게 그게 큰 자극이 됐어요. 가만 생각해 보니 5년이내엔 안 될 것 같고 10년 내로 우승하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두 번째는 아시아리그 출범 후 7년만에 통합 챔피언에 올랐을 때입니다. 당시 쿠시로에서 일본 크레인스와 맞붙어 챔피언이 됐죠. 그런데 우리가 우승하니 상대팀인 크레인스 단장이 우리 회식 자리까지 와서 축하인사를 하고, 다음날엔 기차역까지 배웅해줬어요.. 처음엔 ‘왜 그렇게 까지 하나’ 싶었는데 아 저게 우승해 본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것이로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우승을 해봐야 상대가 우승했을 때 정말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대회 성과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은데요.

“평창 올림픽에서 4경기 했는데 3골 넣고 19골 먹었습니다. 그 다음 세계선수권에선 4골 넣고 48골 내줬죠. 경기마다 졌고, 당연히 그때는 정말 화가 났죠.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톱 디비전 대회를 치르던 그 순간 순간이 승패에 관계 없이 가장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세계선수권에선 최고 스타들이 다 나왔잖아요? 우리 선수들에게 아이스하키의 최고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해준 게 가장 큰 보람 중 하나입니다. 그런 것들이 하나하나 쌓여서 사람을 키울 수 있었어요. 경기에 뛰던 선수들이 국제적 안목을 갖게 됐으니 유능한 지도자가 자연스럽게 길러졌고, 국제대회를 몇 번 치르면서 언제든지 세계 대회를 유치할 수 있는 노하우도 생겼어요.”

-슬펐던 순간을 꼽자면?

“올림픽 대표였던 조민호가 갑자기 세상을 뜬 게 가장 슬펐어요. 한국 아이스하키 사상 첫 올림픽 골이 조민호 선수의 스틱에서 나왔죠. 리더십도 매우 뛰어난 친구였어요. 좀 더 선수생활을 하고 나중에 은퇴해서 지도자로도 아이스하키를 위해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려 너무 슬펐어요.”

-화났던 순간은 없었나요?

“화날 일도 있었지만 초창기 얘기죠. 화난다기 보다는 속상한 게 상무 팀이 없어진 겁니다. 외국을 보면 전성기가 보통 스물하나 스물 둘에 옵니다. 주니어프로그램 막 끝내고 오는 애들이 가장 잘해요. 그런데 우리는 선수생활 후반기에 전성기가 찾아옵니다. 선수들이 운동만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군대를 반드시 가야 해요. 군대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인생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그걸 못해줘서 가장 속상해요. 국방부 장관까지 직접 만나서 얘기했는데도 결국 안 됐습니다. 애들에게 미안하다, 그래도 잘하라 라는 말 밖엔 못한 게 마음에 걸립니다.”

-명예의 전당 헌액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는 사람으로는 빌더와 플레이어가 있어요. 빌더로선 아시아에선 다섯 번째예요. 일본이 3명. 카자흐스탄이 한 명이에요. 저로선 개인적인 영광이지만,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지만, 저 혼자 한 게 아니고 다 같이 열심히 해서 이룬 결과가 아닌가 생각해요.”

-회사를 운영하시면서 아이스하키로부터 배울 점이 있다면?.

“조직이 젊은 사람들을 키우고, 또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그런 게 재미잖아요. 저는 아이스하키를 통해 스피드와 협업(콜래보레이션)을 배웠습니다. 요즘 사회에서 필요한 것 중 가장 많이 쓰는 단어 중 하나가 스피드죠. 그리고 요즘엔 혼자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죠. 다 협력해야 되죠. 스피드와 협력, 아이스하키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두 단어의 의미를 배워야 할 거 같아요.”

-끝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없으신가요?

“아이스하키 재미있으니 정말 많이들 오시고 관전해주셨으면 좋겠어요. 팬들이 많이 오시게 하려면 시설도 그렇듯 해야 하고 접근성도 좋아야 할 겁니다. 그런 면에서 하드웨어가 좀 있어야 하는 시점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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