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없다”…폐관 통보받은 ‘약자 지킴이’ 시설들
창업을 준비하는 여성이나 시각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하는 공공사업과 시설들이 줄줄이 ‘예산 삭감’ 등의 이유로 올 연말과 내년 초 사업 종료를 통보받아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해당 사업과 시설 이용자들은 “당장 새해가 되는데 이제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울상을 짓고 있지만 이렇다 할 해결책은 나오지 않고 있다.
서울 노원구에 있는 서울여성공예센터는 지난 15일 16개 입주기업에 “내년 2월까지 퇴거해달라”고 통보했다. 센터와 입주기업들에 따르면 서울시는 ‘센터 부지를 경제 활성화 거점 지역으로 조성할 계획’이라며 내년도 센터 운영 예산을 서울시의회 상임위원회에서 책정했던 18억원에서 3억1500만원 수준으로 삭감했다. 80% 넘게 깎인 금액이다.
입주기업들은 지난 10월 입주 연장심사에 모두 통과해 내년 12월까지 입주 권한을 약속받았는데 갑작스레 두 달 내 퇴거하라는 통보를 받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입주기업 ‘눈에뜰’ 대표 민지영씨는 “이전에 센터가 인큐베이팅(창업보육)했던 사업들처럼 저희도 1년간 더 있으면서 사업 기반을 다져갈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계획이 모두 틀어졌다”고 했다. 입주기업들은 “갑작스러운 구두 통보에 다른 창업센터로 이사할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쫓겨나게 됐다”며 “내년 12월까지 공간 임대를 허가하고, 불합리한 퇴거 통보가 아니라 공정하고 올바른 절차를 요구한다”고 밝혔다.
2017년 설립된 센터는 여성 공예 초기 창업가들에게 입주 공간을 임대하고 판로 개척을 지원해온 전국 유일의 여성 공예 창업보육 시설이다. 센터는 입주기업뿐 아니라 일반인들이 공예체험을 할 수 있는 ‘메이커스 페이스’도 운영해왔다. 기업 퇴거 후 이를 어떻게 운영할지 구체적인 계획도 제시되지 않았다.
서울시가 2020년 9월부터 지정·운영해온 ‘공공야간약국’ 사업도 올해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내년도 예산이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공야간약국은 오후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1시까지 문을 여는 약국으로 서울시에 총 33곳이 운영돼왔다. 시는 예산을 투입해 지정된 공공야간약국에서 야간시간대 출근하는 약사들의 인건비 절반가량을 보전해왔다.
대한약사회는 “공공야간약국을 하루아침에 문 닫게 만들어 응급실 갈 형편도 안 되는 서민들의 민생고 해결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도 “야간약국처럼 유용한 게 없었는데 이걸 없애나” “다 중단하면 예산은 어디로 가는 것이냐” 등의 반응이 이어졌다.
서울시 ‘공공야간약국’도 문 닫아
약자 보호 시설들 ‘칼바람’
비판이 일자 서울시는 지난 20일 “서울시내에서 밤 10시 이후 운영하는 약국은 총 177곳이고 공공야간약국 비중은 19% 정도”라며 “안전상비의약품 중 13개 품목은 연중무휴 운영되는 편의점에서 구매 가능해 의료 공백에 대한 우려가 크지 않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정수연 늘픔약사회 공동대표는 “취약시간대에 경증·비응급 환자들의 의료 안전망을 약국이 책임진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던 상황에서 서울시가 불과 4년 만에 사업을 중단하겠다는 것”이라며 “서울시가 말하는 오후 10시 이후 문을 여는 약국들은 다음날 오전 1시까지 하는 곳도 아닐뿐더러 약사 개인 사정이 있으면 문을 닫아도 무방한 곳들”이라고 했다.
서울 노원구에서 27년간 운영돼온 서울점자도서관도 올해를 끝으로 폐관한다. 서울점자도서관은 “12월31일부로 폐관하게 됐다”고 지난 18일 공지했다. CD 녹음도서 대여를 중단하고 자원봉사 활동은 26일을 끝으로 종료한다고 안내했다.
서울시에 있는 점자도서관 12곳 중 하나인 이 도서관이 폐관한다는 공지에 장애인의 정보 접근성이 약화할 것이란 우려가 이어졌다. 서울점자도서관을 운영하는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는 폐관 후 도서관의 기존 사업들을 산하 단체에 이관하겠다는 입장이다. 시각장애인연합회 관계자는 “도서관 사업이 완전 종료되는 건 아니다”라며 “내년 초 설립되는 점자문화원으로 이관되는 기능도 있고, 나머지 사업들도 연합회 산하 단체에서 역할을 분배해 맡는 것을 논의 중”이라고 했다.
시각장애인 강윤택씨(44)는 “서울점자도서관은 시각장애인의 소통창구 역할을 해왔고, 도서 제작도 활발하게 해왔던 곳”이라며 “도서관을 폐관하면 기존 기능을 어떻게 할 것인지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 없이 폐관 소식부터 들려 당황스럽다”고 했다.
김송이·김세훈 기자 songy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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