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맹렬히 잡고자 한 김단야, 상하이로 어떻게 탈출했나
“나(단야)는… 29일에 남조선 출장을 떠나 김천에 내렸다가, 30일 오전에 김천서 사변의 급전(急電)을 받고 곧 몸을 피하여, 2일간 산촌에 잠복하였다.”1
김단야는 1925년 11월 말 조선공산당 제1차 검거 사건이 터졌을 때, 자신이 처했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운이 좋았다. 자신이 남조선 방면으로 출장을 떠난 그다음 날 새벽에 서울 종로경찰서가 일제 검거에 착수했던 것이다. 그날 하루에만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와 조선공산당의 간부 일곱 사람이 검거됐다. 김단야도 공청 중앙집행위원이었기에, 서울에 머물렀더라면 틀림없이 검거 대상자 명단에 올랐을 것이다.
고향에서 마지막으로 가족 만나
김단야가 경성역을 출발한 일시는 11월29일 밤 9시55분이었다.2 그 시각 열차를 타고 경부선을 따라 남행했다. 열차는 합법 신분이 없는 사람에게는 위험한 교통수단이었다. 정거장에 도착할 때마다 경찰과 헌병 보조원이 차례로 탑승해 감시의 눈길을 쏘아붙였기 때문이다. 아무런 허물이 없는 사람이더라도 두려움을 느꼈다. 순사와 헌병 보조원이 구둣발 소리를 뚜벅뚜벅 내며 지나갈 때마다 “찻간 속은 괴괴하고” “여러 사람의 가슴은 컴컴한 램프의 심짓불이 떨리듯이 떨렸다”고 한다. 관헌들이 한 사람 두 사람 얼굴을 들여다보고 지나친 뒤, 승객들은 으레 가볍게 안도하는 동시에 “깊은 한숨을 쉬는 모양이 얼굴에 뚜렷이 나타났다”.3 김단야는 <조선일보> 신문기자로 그해 9월까지 재직했기에, 여전히 그 신분증으로 열차 내 검문을 가볍게 넘길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기착지는 경상북도 김천이었다. 그곳은 고향이었다. 나고 자란 곳이었다. 할아버지와 부모님, 그리고 아내와 어린 자식들이 있는 곳이었다. 1900년 1월16일 김천군 개령면 동부동에서 태어난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대구 계성학교에 입학했다. 16살 되던 1916년 12월에 동맹휴학의 주동자라는 이유로 퇴학당했을 때, 할아버지는 불같이 화냈다. 선교사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비록 손자라 하더라도 더는 학비를 대주지 않겠다고 호통쳤다.
아버지는 한의사였는데, 일본의 한국 강점 이후 자격이 박탈돼 농업에 종사했다. 김단야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각별했다. 뒷날 그는 “누구보다도 어린 시절 동안 나를 잘 양육해주신 어머니”라고 회상했다. 가족 몰래 일본 유학을 결심하던 17살 때, 그는 오직 어머니에게만 자신의 각오를 털어놓았다. 아내 윤재분도 기독교인이었다. 아들 하나(김진섭)와 딸 하나를 낳았고, 남편 부재의 시댁에서 어린아이들을 키우며 집안을 지탱하고 있었다.
김단야는 고향 집에 들렀다. 이때가 가족과 함께 얼굴을 맞댄 마지막 기회였다. 뒷날 그가 쓴 회고 기록에 따르면, “1925년에 내가 지하로 잠적하고 망명을 떠난 후에는 부친과 아무런 연락도 주고받지 못했다”고 한다.4 부친뿐만이 아니었다. 그리운 어머니, 아내와 어린 자식들도 그때 본 것이 영영 마지막이었다.
50리 길을 걸어서 구미역까지 갔다
고향 집에 머물던 중 그는 긴급전보를 받았다. 서울에서 비밀결사에 관한 대대적인 검거 사건이 터졌으니 급히 피신하라는 내용이었다. 누가 그런 전보를 칠 수 있었을까? 비밀결사의 내막을 잘 알고 김단야가 고향 집에 머무는 것을 인지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대규모 검거가 개시됐음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고려공산청년회 중앙간부 권오설뿐이었다. 그는 당일 아침에 공청 위원장 박헌영의 집을 방문했다가 가택수색 중인 종로서 형사들과 우연히 만난 탓에 연행된 터였다. 경찰이 아직 비밀결사의 전모를 파악하지 못한 덕분에 권오설은 그날 밤에 일시 석방됐다. 그는 곧바로 몸을 숨겨 비합법 지하 활동으로 들어갔고, 당과 공청의 잔류 간부들에게도 급변 상황을 통지했다.
김단야는 위기가 닥쳐왔음을 인지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즉각 절대 피신의 상태로 전환했다. 고향에서는 널리 얼굴이 알려졌으므로 갈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그는 일단 산속으로 숨었다. 인근의 한 산촌에 잠복하기 위해서였다. 김천은 동쪽에 금오산(976m), 서쪽에 황악산(1111m)이 솟은, 소백산맥에 연접해 있는 도시였다. 그중 어느 한 곳에 안전한 연고지가 있었던 것 같다. 김단야는 그곳에서 이틀 밤을 지냈다.
마냥 산속에서만 숨어 있을 수 없었다. 사태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조직의 피해 상황을 파악해 후속 조치를 시행할 의무가 그에게 있었다. 중앙간부가 어디까지 잡혔는지 알아봐야 했다. 12월2일 새벽, 그는 행동에 나섰다. 당시 김단야의 속마음이 어떠했는지 들어보자.
“일선(一線) 전부가 다 검거된 줄 알고, 비록 잡히더라도 2선(이미 결정해놓은) 정리를 하려고 상경하고자 2일에 보행 50리로 구미역까지 갔다가, 그곳서 신문을 얻어보고 다소 안심하였다. 2선 동무에게 통지해줄 1선 동무들이 몇 사람 남았었다. 고로 상경계(上京計)는 파(破)하였다.”5
‘일선’(一線)이니 ‘이선’(二線)이니 하는 말은 비밀결사의 집행부 구성원을 가리키는 은어였다. 일선 간부란 1925년 4월18일 고려공산청년회 창립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집행위원 7명을 뜻했고, 이선 간부란 경찰의 탄압으로 중앙 간부에 결원이 생길 때 그를 대체할 수 있도록 미리 선정한 후보 간부진 7명을 뜻했다.
김단야는 일선 간부가 자신을 빼고는 모두 검거됐다고 생각했다. 이 추정이 맞는다면 속히 상경해서 ‘2선 동무’들을 지휘해 중앙집행위원회를 정상화해야만 했다. 그 과제가 자신에게 주어져 있었다. 김단야는 50리 길을 걸어서 구미역까지 갔다. 김천역에는 자신을 체포하려는 형사대가 잠복해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일 터다. 그래서 더 남쪽에 있는 구미역을 택했다. 5시간쯤 걸렸을 게다. 구미역에는 2일 정오께나 도착했을 것이다.
여비는 7원, 어디로 갈까
김단야는 구미역에서 신문을 구해 볼 수 있었다. 그를 통해서 적이 안심했다고 한다. ‘1선 동무’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정보를 얻었을까. 그날 신문을 들여다보자. <동아일보> 1925년 12월2일치에 ‘종로서 주의자 검속 사건’이라는 제하의 기사가 실렸다. “시내 종로서 고등계의 활동으로… 일곱 명을 인치하고 비밀리에서 엄중히 취조를 한 결과, 그중 권오설, 주종건, 허정숙씨 등 세 사람은 지난달 30일 밤에 방석하고, 나머지 네 사람에 대하여는 더욱 취조를 계속하는 중”이라는 정보가 수록돼 있다. 도망자에게는 몹시 유용한 정보였다. 공청 중앙집행위원 권오설이 자유로운 상태에 있음을 알게 됐다. 큰 위안을 느꼈다. 권오설이라면 너끈히 2선 동무들을 지휘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김단야는 상경 계획을 취소했다. 자기가 2선 동무들을 지휘해 중앙집행위원회 복원 임무를 맡는 게 아니라면, 굳이 서울로 갈 이유가 없었다. 서울은 위험했다. 그는 <조선일보> 기자로 동분서주했고, 합법 청년단체 신흥청년동맹의 집행위원으로서 얼굴을 내놓은 터였다. 형사치고 자신의 얼굴을 모르는 자가 없을 지경이었다.
“제일 맹렬히 잡고자 하는 것이 곧 내 자신이었다. 그래서 일은 이미 터졌는즉 남북 관문(신의주, 부산)을 지키기 전에 빠져나가야겠다고 결정하였다. 그러나 여비는 다만 7원밖에 없었다. 그러나 할 수 없이 떠나기는 떠나야 될 것이었다. 그래서 그 남행(南行)을 타고 일본을 건너갔다.”6
김단야는 즉시 국외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경찰이 가장 맹렬히 추적하는 혐의자는 현 상황에서는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탈출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도 비밀결사의 보위를 위해서도 절실히 필요한 일이었다. 국외로 망명하는 길은 둘 있었다. 북쪽 관문 신의주를 통하거나, 남쪽 관문 부산을 경유하는 길이었다.
그는 구미역에서 북행이 아닌 남행 열차표를 샀다. 신의주가 아닌 부산을 선택했던 것이다. 부산을 통해 바닷길로 국외 망명을 꾀했다. 국경을 통과하기에 좀더 용이하다고 봤기 때문이지만, 수중에 여비가 7원밖에 남지 않은 사정도 고려했다.
김단야는 부산항과 일본 시모노세키항을 오가는 연락선에 탑승했다. 두 항구에서 경찰의 눈초리를 피하려면 복장을 잘 꾸미는 것이 필요했다. 김단야는 ‘촌사람’처럼 변장했다. 일자리를 위해 일본으로 도항하는 조선 농민인 양 꾸몄다. 그는 삼등실에 승선했다. 연락선 운임이 쌌기 때문이다. 그즈음 삼등실 운임은 3원55전이고, 이등실은 그보다 3원 남짓 더 비쌌다.7 삼등실은 매사에 경쟁이었다. 서로 먼저 타려는 승객들로 항상 혼잡했다. 들어가는 것도 경쟁, 나오는 것도 경쟁, 잠자는 것도 경쟁이었다. 3등 승객에게 제공되는 자리는 ‘참외 원두막으로서는 너무도 몰취미하고 더러운 2층 침대’였다.8 운항 시간은 8~9시간 걸렸다. 낮에는 8시간, 밤에는 9시간이 소요됐다.
상하이 황포탄 부두에 세 번째 도착
시모노세키 항구에는 지인들이 있었다. 손위 누이가 결혼해 남편과 함께 그곳에서 노동일을 하며 살고 있었다. 그 자형에게서 여비를 얻었다. 또 노동일 하는 다른 지인들에게서 도합 30원을 꾸었다.
김단야는 마침내 12월4일 일본 모지 항구에서 중국 상하이행 배를 탈 수 있었다. 이번에는 헌 양복을 한 벌 사서 겉모습을 꾸몄다. 양복을 갖춰 입음으로써 사업이나 학업을 위해 상하이로 나가는 지식층인 것처럼 가장하기 위해서였다.
모지항에서 상하이까지 가는 항해에는 49시간이 걸렸다. 이틀에 더해 한 시간이 더 걸리는 여정이었다. 김단야가 상하이에 도착한 시점은 12월6일 오후였다.9 서울에서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일제 검거가 시작된 지 정확히 일주일 만이었다.
그가 상하이 황포탄 부두에 발을 딛기는 이번이 세 번째였다. 첫 번째는 1919년 12월 망명 때이고, 두 번째는 1925년 1월 <조선일보> 기자로서 강소·절강 군벌전쟁 취재차 특파됐을 때이다. 뒷날 김단야는 세 번째 상하이에 도착하던 때의 심정을 토로했다. 적의 철창 속에 동지들을 두고서 홀로 이곳에 발을 내딛다보니, 가슴속에 형언하기 어려운 쓰리고 아픈 감정이 솟아 올라온다고 말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참고 문헌
1. 金柱, ‘조훈 동무 아울러 김제혜 동무’, 1쪽, 1925년 12월7일, РГАСПИ ф.533 оп.10 д.1889 л.1-2.
2. 고공청 중앙집행위원 권오설, 김동명, ‘第特號 1, 幹部 被捉 사건에 대한 보고’, 4쪽, 1925년 12월3일,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31 л.222-224.
3. 염상섭, <萬歲前> 고려공사, 141~142쪽, 1924년 8월.
4. Ким Даня(김단야), Автобиография(자전), 1937년 2월7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л.56-65.
5. 金柱, 앞의 글, 2쪽.
6. 위와 같음 .
7. 노정호 , ‘ 근대 한일항로에 관한 연구 ’, 부경대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 116~117 쪽, 2007년.
8. 염상섭 , 앞의 책 , 49 쪽 .
9. 金柱 , 앞의 글 , 2 쪽 .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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