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재판 지연의 해소 방책
신속한 재판을 위한 환경은
신속하게 조성되지 않는다
급조된 몇 가지 방책을 내놓고
자족하지 않아야 할 텐데
그것이 조금 걱정이다
전임 대법원장의 임기가 다할 무렵부터 재판 지연에 대한 논의가 눈에 띄게 늘었다. 신임 대법원장도 재판 지연을 사법부의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보수 성향의 언론에서는 재판 지연의 문제를 보도하면서 늘 야권 정치인들에 대한 재판이 늦어진 것을 예로 꼽는데, 정치인들이 당사자인 사건의 재판이 꼭 요즘 들어 지연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선거재판이 늦어지는 것은 이미 수십년래의 일이다. 그런데 국민의 법률생활을 생각할 때 정말 심각한 것은 민사재판, 그중에서도 소송가액이 5억원을 초과하는 민사합의사건의 재판 지연이다. 나 자신도 2013년에 제기된 소송의 피고에게서 사건을 맡았는데 2022년에 들어서야 1심 판결을 선고받은 일이 있다.
기실 재판 지연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외려 우리 법원의 사건 처리 속도는 외국의 예에 비해 현저히 빠른 편이다. 우려스러운 것은 재판 지연의 추세가 나빠지는 쪽이라는 점이다. 또 재판 지연은 요즈음만의 문제도 아니다. 구약성경의 출애굽기에는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에게 재판 지연을 막기 위한 방법을 말하는 장면이 나오고, 3세기 초 편집된 유대교의 문헌 피르케이 아보트에도 재판 지연의 후과를 경고하는 문구가 담겨 있다. 영국의 법률가 코우크의 ‘정의의 지연은 정의의 거부’라는 법언이 실린 저작물이 나온 때는 17세기 초였다. 1953년에 나온 미국의 논문에는 뉴저지주의 어느 판사가 심리종결 후 12년이 지나서야 판결을 선고한 사례가 실려 있고, 인도에서는 대법원장이 눈물을 흘리며 그 나라 총리에게 재판 지연의 개선을 위해 판사 증원을 애원한 이야기도 있다. 세계 각국의 법원엔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분량의 사건이 넘친다. 재판 지연은 동서고금의 고질병이다.
오늘날 재판 지연은 왜 일어나며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우선 사건 자체나 당사자에게 원인이 있을 수 있다. 전반적으로 요즘 사건은 점점 어려워지고 변론과 증거가 넘쳐 심리하기 어렵다. 또 우리나라의 형사고소 건수는 일본에 비해 절대수로 50배가 넘는다. 게다가 당사자들은 판결에 잘 승복하지 않는다. 상소심의 일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인적 요소로 눈을 돌려 보면, 과거처럼 사법연수원에서 오랜 기간 강도 높은 판결 작성 교육을 받은 후 젊은 나이에 바로 임관하던 것과는 달리 법조 일원화 제도의 시행 과정에서 신임 판사의 평균 연령이 높아져 업무 수행 능력이 떨어진다는 견해가 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주중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그저 죽어라 일하던 과거와는 달리 요즘의 젊은 판사들이 워라밸의 생활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것이 원인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고등부장 제도가 없어지면서 중견 판사들의 업무 긴장도가 떨어진다거나 법원장이 선거로 뽑히다 보니 판사들에 대한 업무 독려가 여의치 않다는 것이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현실은 이제 대부분 받아들여야 하거나 되돌리기 어려운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법원의 고질적인 인력 부족, 즉 판사 수의 부족이다. 판사 수를 유례없이 늘리지 않으면, 단언하거니와 재판 지연 문제는 절대로 해결되지 않는다. 판사의 과로와 사명감만으로 재판 지연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법관 정원의 확대와 그에 따른 예산 증액은 국회의 입법사항인데, 국회는 이 문제에 잘 협조해주지 않는다. 법원의 오랜 과제였건만 늘 그래 왔다. 금년에도 관련 법안은 통과될 전망이 없다.
그런데 재판이란 본래 숙고의 과정이다. 시급한 과제라고 하여 재판 지연의 해소 방책이 졸속으로 흐르면 그것도 위험하다. 예를 들어 지연 원인 중 재판 방식에 문제가 있다면서 개선하자는 논의가 있지만, 자칫하면 재판의 신속을 위해 충실한 심리가 희생될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1심과 2심에서 증거조사를 충분히 해주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이 높은데, 법원에 신속한 재판 드라이브가 걸리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나는 과거 어느 대법관으로부터 법원 상부에서 재판이 늦어진다며 무슨 조치를 하면 곧바로 대법원에 올라오는 하급심 판결들의 질이 떨어진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물론 법원이 감정서의 제출을 독려하지 않거나 후속 절차에 필요한 결정을 자꾸 미루는 예에서 보듯 심리 지연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다른 문제다.
신임 대법원장은 인사청문회에서 “재판 지연의 원인이 한 곳에 있지 않은 만큼 세심하고 다각적인 분석을 통해 실타래를 풀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옳은 태도다. 다만 신속한 재판을 위한 환경은 신속하게 조성되지 않는다. 급조된 몇 가지 방책을 내놓고 자족하지 않아야 할 텐데, 조금 걱정이다.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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