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아의 갈등하는 눈동자] 어떤 시인의 데뷔 방식
작가의 데뷔를 결정하는 사람은 누굴까? 데뷔 작가의 대부분은 출판사나 신문사 혹은 문학상의 심사위원들로부터 발탁된 바 있을 것이다. 입구가 바늘구멍처럼 작을수록 등용문은 멀어지고 높아지고, 그렇기에 더욱 권위를 갖는 것처럼 보인다. 편집자나 심사위원에게서 온 전화를 받는 이들은 극소수다. 선택받지 못한 다수는 포기하거나 재도전하며 특수한 시험대를 통과하고자 애쓴다. 그러나 누군가의 승인 없이 스스로 데뷔하는 작가들도 있다. 그들은 새롭게 길을 낸다.
독자와 작가 사이 관문 건너뛰기
12월16일. 시인 계미현은 웹사이트 형태로 첫 시집을 발표했다. 디지털 영토 위에 지어진 이 시집엔 그의 글을 정확히 떠받치는 뼈대와 디테일이 넘치도록 훌륭하게 갖춰져 있다. 시집 제목은 범상치 않게도 <현 가의 몰락>이다. 계미현은 이 형식을 웹시집이라고 부른다. 그의 시집을 종이책으로 먼저 볼 수 없다는 게, 그와 서둘러 함께할 출판사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게 처음엔 서운했다. 또한 이토록 높은 품질의 텍스트와 이미지가 무료란 점이 동료로서 분통이 터졌다. 내가 돈에 대한 궁리를 하는 동안 계미현은 독자들을 향해 개미처럼 굴을 팠다. 아래쪽에서 쓴 시를 모아 가상공간을 지은 것이다.
그의 작품을 읽으며 나는 시집이 무엇보다도 공간임을 이해했다. 이것이 종이책의 이전 단계가 아니라는 것과, 그의 데뷔가 이미 독보적으로 완성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계미현은 내 발밑으로, 기나긴 가부장제와 종차별주의와 자본주의의 발밑으로 깊고 넓게 구불구불 길을 내는 시를 쓴다. 우리를 약하게 하는 말들을 가지고 놀고, 부자들의 케이크 조각을 훔쳐 지하로 가져가고, “무지무지 신맛”으로 돌려주는 글쓰기다.
시집은 국문과 영문으로 동시에 발표되었다. 지난 17일, 책 없이도 성대하게 치러진 <현 가의 몰락> 낭독회에서 계미현은 말했다. “저의 중요한 정체성 중 하나는 아시아인이라는 것입니다. 시를 쓸 때 제가 아시아인임을 견지하고 쓰려고 노력해요. 백인 문화권에서 읽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쓴 시들이 많아서 영문으로도 번역했습니다.” 그가 아시아인으로서, 남자 아닌 자로서, 그리고 곤충으로서 쓴 시들은 번역가 공민이 설계한 터널을 통해 책보다 빠르게 대륙을 횡단한다. 한국의 독자들뿐 아니라 영어를 쓰는 백인 문화권에도, 자신이 주류임을 의식하지 않아도 될 만큼 숨쉬듯 주류인 사회에도 계미현의 시가 유통될 것이다.
웹시집에 수록된 계미현의 시 ‘승은의 인사’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있다.
“그리고 맘충/ 말 그대로 엄마벌레/ 내 아기벌레에게 충실한 엄마벌레/ (…) 니 코딱지만큼/ 깨끗하고/ 니 코딱지만큼/ 작은/ 벌레/ 깨끗하게 작게/ 여기 있는 벌레”
이 재밌고 통렬한 시에 관해 계미현은 덧붙였다. “충(蟲)이란 혐오표현을 꼭 시에서 한 번 다루고 싶었어요. 왜 ‘충’을 혐오표현으로 사용하는지 이해가 안 됐어요. 저는 곤충을 너무 좋아하기에 곤충을 비유로 썼을 때 나쁜 뜻이 된다는 걸 처음엔 잘 납득할 수가 없었거든요. 제가 스스로를 ‘엄마인간’이라고 했을 때 딱히 혐오표현이 되지 않는 것처럼, 곤충이 직접 말하게 해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비서구, 비남성, 비인간, 비등단
시인 김선오는 계미현의 시를 두고 “인간과 동물이 서로의 존재 위로 엎치락뒤치락하며 가변적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라 해석했다. 계미현 시집에서 개미는 시를 위해 동원되는 타자에 그치지 않고, 시인인 동시에 화자로서 움직인다. 인간과 개미 중 어느 쪽인지 확신할 수 없게 불분명하게 그린 것은 의도적 선택이다. “우리가 인간의 죽음을 대하듯 비인간동물의 비극에 감응할 수 있다면 이는 인간에 대한 우선순위를 빼앗는(-) 게 아니라 연결의 대상을 확장하는(+) 일이 될 것이다.” 김선오의 문장이다.
한편 계미현의 시를 리뷰한 번역가 소제는 마치 면허 제도처럼 글 쓰는 자격을 발급해온 한국문학의 등단 시스템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계미현은 시를 쓰기 위한 면허가 없고, 공민한테 번역을 부탁했으며, 김선오에게 리뷰를 부탁했고, 나에게 공민의 번역을 리뷰해달라고 하여 이를 웹사이트를 통해 선보인다. 무면허 시인. 이게 펑크지.”
데뷔라는 건 필연적으로 공동 작업이다. 완벽하게 혼자서 작가가 된 이를 나는 알지 못한다. 권위자들의 광채와 함께 높은 곳에서 데뷔하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동료들과 지하에서 등장하는 작가도 있다. 후자의 인물들이 세상에 나타나는 방식에 관심이 많다. 계미현은 자신의 웹시집이 무료라서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시창작 수업을 들을 돈이 없었던 사람, 원하는 만큼 시집을 살 돈이 없었던 사람은 그 자부심을 단번에 이해할 것이다. 경향신문이라는 권위 있는 지면에, 아무런 입장료도 필요하지 않은 그의 웹시집 주소를 꾹꾹 눌러 적으며 칼럼을 마친다.(thefallofthehyuns.net)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헤엄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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