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끝에 서기보다는 칼이 되는
[세상읽기]
[세상읽기] 최영준 |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이번 칼럼 제목은 며칠 전 희망제작소의 ‘위기의 사회적경제,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특별좌담회에서 나왔던 이철종 선생님 발언이다. 위기의 맥락은 이렇다. 사회적기업 지원사업 예산이 내년 60%가량 삭감되면서, 사회적기업의 ‘혹한기’가 예상되고 있다.
현재 3200여개의 사회적기업은 3만6천명이 넘는 취약계층 고용을 담당하고 있으며, 영리기업이 들어오지 않는 분야에서 필수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시장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정부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문제에 대응하고, 삶의 질을 높이며 사회적 가치를 창출한다. 지역에서는 비영리 시민사회 조직들과 함께 공동체의 중요한 거점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회적기업 예산을 대거 삭감한다니 답답한 마음 그지없다. 현 정부는 국가와 시장이 할 수 없는 영역이 상당히 크다는 사실이나 사회적 가치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하다. 모든 부처를 ‘산업부’로 해야 한다는 대통령의 인식과 기재부의 긴축예산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또한, 시민사회와 사회적경제는 자신들의 정치적 적일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도 원인이 되었을 것 같다.
정책의 기본을 무시한 처사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정책은 ‘게임의 규칙’과 같으며, 정책이 가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예측 가능성이다. 시민들은 규칙에 맞추어 게임을 준비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는 시민들이 충분히 대비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예측 가능성을 담보해야 하는 정부가 앞장서서 이를 무너뜨리니 참으로 안타깝다. 당장 생계가 막막해질 분들과 이들의 서비스를 단비처럼 여겼던 많은 이들이 위기에 처하기 때문이다.
약자복지를 주장하고, 사회서비스 고도화를 추진하는 현 정부의 기조와도 매우 모순된다. 구구절절한 비판을 하기에 지면이 아깝다. 다른 시선으로 이 이슈를 보자.
다시 희망제작소의 특별좌담회로 돌아가면 이철종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대비가 안이했다고 생각합니다. 지원 정책 중심으로 움직이면 지원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쪽에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김인선 선생님은 “사회적경제 쪽이 뭘 할지 고민하기보다 뿌려지는 자원에 휩쓸려 그 모양에 맞추려 하니 시민의 자발성, 주도성을 발휘하는 데 역부족입니다. 지금은 자기 성찰의 기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라고 지적한다.
많은 정책이 시민사회의 자발적 실험과 운동의 결과물이며, 빈민 운동과 협동조합 운동에 뿌리를 둔 사회적기업도 예외가 아니다. 권위적 개발주의 시대를 거치며 성장했던 시민사회는 민주주의의 옹호자를 넘어 곳곳에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며 사회적 가치를 창출했다. 사회문제에 대한 대응이 무뎠던 국가에 시민사회는 서슬 퍼런 칼날이었다. 칼끝에 선 국가는 이들의 문제해결 방식을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시민사회의 좋은 아이디어를 정부가 받아들여 전국에 실행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바람직하다. 다만, 그 방식이 문제다. 사회적기업 도입 때도 지금처럼 정부는 몰아쳤다. 상대방과 협의하며 중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세심하게 진행하지 않았다. 그 결과 정부는 인증제도와 예산 지원을 앞세워 칼자루를 쥐게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적기업은 그 칼날 끝에 서 있게 되었다.
모두는 아니지만, 비영리단체들도 유사하다. 과거 인권과 복지에 앞장섰던 한 단체는 이제 정부의 다양한 사회서비스를 위탁받아 대행하는 역할로 변화되었다. 정부의 요구에 수동적으로 대응하고, 관리를 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단체의 역할이 되었다. 지난 15년 동안 사회적기업과 비영리단체들의 덩치는 커졌다. 하지만 이전 어려웠던 시기에 길러왔던 근육은 빠졌으며, 날 섰던 칼날은 무뎌졌다.
혹한기가 시작되었다. 다양한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소멸의 시간이 아닌 성찰의 시기가 되기를, 재정비를 통해 사회적 가치 창출에서 주도성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기를 희망한다. 국가와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고민은 계속되어야 한다. 새로운 모형에서는 사회적 가치 창출에 대한 인정, 사회적기업의 자율성 담보, 그리고 당사자의 정책 주도성이 필요하다. 선도적 지방자치단체가 혹한기 이후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모형에 대해 실험을 해주시길 기대해본다.
성찰과 연대로 어려움을 이겨낸다면 혹한기는 사회적경제가 또 다른 ‘칼’이 되는 시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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