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청년 비례대표의 ‘빚’
[한겨레 프리즘]
[한겨레 프리즘] 조혜정 | 정치팀장
“청년은 그냥 젊기 때문이 아니라 빚진 데가 많지 않아 덜 얽매일 수 있다. 조금 터놓고 얘기하자면 ‘싸가지 없음’이기도 하다. 싸가지 없이 정치했으면 좋겠다. 시민들이 굳이 청년 정치인에게 기회를 주는 것은 중장년 정치인들을 똑같이 따라 하라고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지난 1일치 한국일보의 류호정(31) 의원 인터뷰를 읽다가 이 대목에서 현기증이 났다. 빚진 데가 많지 않다니, 지난 총선 때 당의 청년·여성 할당제 덕에 ‘정의당 비례대표 1번’으로 당선된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2020년 3월 정의당 비례대표 후보 경선에서 류 의원은 득표율 1.76%에 그쳤다. 노동운동이나 당 활동 경력도 각각 1년3~4개월 남짓으로 다른 후보들보다 짧았다. 그럼에도 류 의원은 청년에게 정치의 문호를 대폭 열자는 당의 결정에 따라, ‘35살 이하 후보자’ 가운데 1등이라며 비례 1번을 배정받았다.
청년 정치인에게 쏠린 기대를 류 의원은 모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당선 뒤인 2020년 4월16일 페이스북에 “‘무거운 책임감’이라는 말로 부족하다. 하지만 제게는 착실히 준비해온 그동안의 과정이 있고, 정의당에는 일당백의 유능한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여러 인터뷰를 통해 서민과 노동자, 여성, 약자를 위한 정치를 하겠단 다짐도 거듭했다.
그랬던 류 의원에게 이제 정의당은 ‘청산 대상’이다. 지난 4월, 류 의원이 속한 ‘정치유니온 세번째 권력’은 정의당을 “노동조합의 이익을 수호하는 데 그치는 정당” “폐쇄적 운동권 정당”이라 비판하며 해체를 주장했다. 지난 17일엔 금태섭 전 의원이 주도하는 ‘새로운 선택’과 공동 창당대회를 연 뒤 기자들과 만나 “정의당 당원과 지지자는 현재 운동권 연합 신당이냐, 전혀 다른 신당이냐를 고민할 것이다. 나는 후자를 요청한다”고 했다.
당 안에 들어가 보니 바깥에서 보던 것과 달랐을 수 있다. 지향점이 달라 비판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류 의원이 신당 창당을 공식화하고 그 행사에 참석하면서도 정의당 탈당을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류 의원은 “탈당이 상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13일, 에스비에스 라디오 ‘김태현의 정치쇼’)며, 정의당의 선거연합 대상을 결정하는 내년 1월 당원 총투표 때까지 ‘제3지대 신당을 만들자고 당원들을 설득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류 의원의 주장은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당 안팎에선 “지역구 당선은 가망이 없으니, 비례대표 한번 더 하려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이 더 많다. 당 비상대책위원회 대변인인 김종대 전 의원은 지난 15일 유튜브 채널 ‘장윤선의 취재편의점’에 출연해 류 의원이 “진보정치 전체를 상대로 패륜을 저지른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공직선거법상 비례대표는 자진 탈당할 경우 의원직을 잃지만, 출당 또는 제명되면 그렇지 않다. 또한 국회의원 임기(내년 5월29일)로부터 120일 이내인 내년 1월30일부터는 류 의원이 탈당하더라도 정의당에서 비례대표직을 승계하는 게 불가능하다.
류 의원의 행보는 초현실주의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지난 총선을 “미래통합당 등 수구 보수 정치 세력에 대한 준엄한 심판”(2020년 4월16일 페이스북)이라고 평가해놓고, 그 당의 총괄선거대책위원장과 비상대책위원장을 지낸 김종인(83) 전 위원장과 신당을 만든단다. “평균 나이 55세 남성이 (국회의원) 전체의 82%나 되는데 이 틀을 깨야 된다. 이젠 ‘아저씨 정치’ 그만해야 한다”(2022년 3월29일치 ‘투데이신문’)고 해놓고, 56살 금태섭 전 의원과 손을 잡았다. 젠더 문제를 강조하면서 ‘여혐’ 비판을 받는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와 연대 가능성을 열어뒀고, 서민과 노동자를 위한 정치를 약속하면서 주휴수당 폐지를 추진하겠단다. 류 의원은 최소한, “중장년 정치인들을 똑같이 따라 하지 말라”며 청년 정치인에게 기회를 준 시민들의 바람은 저버린 것 같다.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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