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적 정치 시스템’의 붕괴, 자민당 비자금 사건

한겨레 2023. 12. 24.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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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일본 집권 자민당의 정치자금 문제가 급격하게 전개되고 있다.

비리 사건 이후 정치자금에 관한 규제가 강화되고, 자민당의 유력 정치인이 뇌물이나 불법 자금을 받는 일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번 문제는 정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조직 전반에 걸친 '일본적 시스템'의 붕괴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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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창]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지난 9월 자민당 간부 인사와 함께 대대적인 개각을 단행했다. 기시다 총리가 새로 임명된 대신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총리 관저 누리집 갈무리

[세계의 창]

야마구치 지로|일본 호세이대 법학과 교수

 최근 일본 집권 자민당의 정치자금 문제가 급격하게 전개되고 있다. 우선 이번 문제를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지난 50년 동안 자민당에서는 부패 사건이 여럿 발생했다. 1988년 리크루트 뇌물 사건으로 다케시타 노보루(1924~2000) 당시 총리가 퇴진하고, 1992년 사가와규빈의 정치자금 제공 문제로 거물급 정치인 가네마루 신(1914~1996) 의원이 체포되면서 정치권에 큰 충격을 줬다.

비리 사건 이후 정치자금에 관한 규제가 강화되고, 자민당의 유력 정치인이 뇌물이나 불법 자금을 받는 일은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정치인들이 자금을 모으기 위해 ‘파티’라는 방법이 퍼졌다. 한장에 2만엔(약 18만원) 하는 파티권을 구매한 사람을 대상으로 강연과 음식을 제공하는 행사다. 실제로는 행사장 수용 인원을 훌쩍 뛰어넘는 티켓을 팔고, 음식도 일부만 제공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치인들은 이를 통해 큰 흑자를 내어 정치자금으로 사용한다.

그렇다면 왜 파벌들은 대규모로 자금을 모으는 것일까. 한국에선 국민의 직접선거로 대통령을 뽑지만, 일본의 총리는 국회의원들이 선출한다. 자민당 정권이 안정돼 있을 때는 자민당 총재가 총리가 된다. 그래서 총리 자리를 노리는 정치인은 자민당 내에서 동지나 측근을 만들어 총재 선거에서 승리하려고 한다. 이런 이유로 파벌이 존재한다. 파벌 활동을 위해서는 대규모 자금이 필요하고, 각각의 파벌마다 자금 모으기가 계속된다.

현재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수장선으로 있었던 ‘아베파’의 비자금이다. 소속 의원들에겐 모금 행사 파티권 판매에 대한 할당량이 부과됐다. 의원들의 판매 노력을 촉진하기 위해 할당량을 넘겨 티켓을 팔 경우 각각의 정치인에게 그 몫이 돌아갔다. 그 자금이 정치자금수지 보고서에 기재되지 않고 비자금으로 사용돼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이 법을 위반한 정치인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자격을 잃는다. 검찰의 이후 수사가 어디까지 확대될지 알 수 없지만, 아베파 간부가 체포·기소되면 아베파뿐만 아니라 자민당도 위기에 처한다.

이번 문제는 정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조직 전반에 걸친 ‘일본적 시스템’의 붕괴로 이해할 수 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근대화를 추구하며 서양식 법제도를 들여왔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뒤 점령군의 지휘 아래 민주화가 추진됐지만, 정치·행정·경제 각 분야에서 일본식 시스템이 유지됐다. 조직의 획일주의, 상명하복의 복종 관계, 규칙과 관행의 이중구조다.

하지만 1990년 전후부터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국제사회의 규칙이 일본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바뀐 것은 경제계다. 기업은 글로벌 경쟁에 노출돼 있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를 관리하던 관료들도 이에 연동해 달라졌다. 민간 기업의 과도한 접대 등은 옛말이 됐다.

정치라는 세계는 글로벌 경쟁이 없었던 만큼, 변화에서 가장 뒤처져 있다. 30년 전 정치개혁으로 정당이나 정치가의 자금 모금과 그 사용처를 모두 투명하게 공개하기로 했다. 하지만 정치의 세계에선 선거와 파벌로 흔적이 남지 않는 돈이 필요했고, 파티권 수입의 일부가 비자금으로 사용됐다. 규칙과 관행의 이중구조가 오늘날까지 이어져온 것이다.

국민의 분노는 거세고, 기시다 후미오 내각에 대한 지지율은 10~20%대까지 떨어졌다. 기시다 내각과 자민당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정치 분야의 규칙 강화는 피할 수 없다. 중기적으로 볼 때 정치에도 ‘일본적 시스템’의 붕괴가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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