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의 호위와 크리스마스의 가호를! [정끝별의 소소한 시선]

한겨레 2023. 12. 24. 18:2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끝별의 소소한 시선]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재영

정끝별 | 시인·이화여대 교수

힘든 일들이 많았던 한 해였다. 연초에 고관절이 부러져 몸져누워버린 엄마를 여름 끝에서 보내드려야 했다. 동료와 스승과 문단의 어른들을 떠나보냈고, 친지들의 부모님상도 잦았다. 오해와 갈등으로 관계들이 꼬였으며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이 끊이질 않았다. 선물처럼 받은 다행한 일도 있었으나 그로 인한 기쁨은 너무 짧았다.

그리고 드디어, 마침내, 크리스마스다! 이즈음이면 만나는 사람마다 쓰담쓰담하거나 와락 껴안고 싶다. 한 해의 무게를 잘 감당해냈으니 대견하다고, 새해의 무게 또한 정직하게 마주하면서 울력하자고, “메리-크리스마스!”를 건네며. 메리-크리스마스는 세상 모든 사랑의 가능성을 최대치로 이끌어주는 힘을 발휘하는 주문 같다. 그 힘을 함께 나누라고 크리스마스는 공휴일이다. 게다가 오늘의 크리스마스처럼 주말에 이어진 크리스마스라면 더욱 ‘메리(즐거운)’할 밖에!

이런 크리스마스에는 흰 눈이 왔으면 좋겠다. 눈이 오면 우리는 고갤 들어, 하늘 저편이든 저기 너머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눈의 향방을 좇기 마련이다. 복닥거리는 현실을 잠시 놓을 기회라는 듯, 근심 가득한 이 진창을 잠시 벗어나려는 듯, 그렇게 먼 곳을 가늠하곤 한다. 은총처럼 내리는 크리스마스의 흰 눈이라면 더더욱! 그리 하얗게, 그리 가볍게 가없이 사라지는 존재가 발산하는 아름다움에 눈부셔하면서.

그리하여 크리스마스에는 덜 외롭고 덜 쓸쓸하면 좋겠다. 초록의 생명과 빨강의 사랑으로 가득 차기를 소망한다. 크리스마스트리는 그런 바람을 담아 늘 초록 나무에 빨간 공들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는 것이리라. 쨍한 초록 잎에 빨간 열매들이 빼곡한, 호랑가시나무를 엮어 만든 크리스마스 화환은 또 어떤가. ‘크리스마스 스타’라는 포인세티아의 초록 잎들과 빨간 잎들 역시 ‘메리’를 촉진한다.

빨간 호랑가시나무 열매는 ‘사랑의 열매’이기도 하다. 소액을 기부하고 받은 사랑의 열매 배지를 초록 반코트 깃에 브로치처럼 달아놓았다. 이 세 알의 빨간 열매를 볼 때마다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김종길, ‘성탄제’)라는 시 구절을 떠올린다. 그때마다 배지를 단 왼쪽 심장의 피가 콩닥콩닥 더 잘 뛰는 것만 같다.

땡그랑 땡그랑 종소리가 호위하는 ‘구세군 자선냄비’도 빨갛다. 그 곁에서는 “노래하자 파람파팜팜~”으로 시작되는 캐럴 ‘북치는 소년’이 울려 퍼졌던가. 드릴 것 없는 헐벗은 내게도, 긴 밤을 지키는 염소와 양들에게도, 성탄의 즐거움과 영광과 평화와 축복의 노래를 모두 함께 부르자는 내용이다. 반복되는 ‘파람파팜팜’의 북소리는 힘들고 지친 존재를 호위하는 듯 듣는 이의 마음을 북돋곤 한다.

캐럴 ‘북치는 소년’은 전쟁의 포화를 뚫고 휴전선을 넘어 월남한 김종삼 시인의 아름다운 시로 재탄생했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이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북치는 소년’)이 그 전문이다. 이 시가 쓰였던 1960년대는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시기였다. 고아원과 교회와 학교를 중심으로 ‘서양 나라’에서 온 온갖 구호, 선교, 군용 물자들이 ‘가난한 아희’들에게 배급되었다. 그런 아이들에게 머나먼 서양 나라에서 온 크리스마스카드나 캐럴은 그야말로 멀리 있어서 더욱 아름다운, ‘내용 없는 아름다움’의 세계였을 것이다. 그런 크리스마스에 내리는 진눈깨비는 소금처럼 짤 것만 같다.

“탄일종이 땡땡땡~ 은은하게 들린다~”로 시작하는 ‘탄일종’이라는 캐럴도 전쟁 중에 공개되어 서양 나라에까지 역수출되었다. 전쟁 직전, 크리스마스 전야에 교회에서 아들이 부를 노래를 엄마(최봉춘)가 작사하고 아빠(장수철)가 작곡했다. 이후 아들을 잃고 전쟁을 피해 떠난 “저 깊고 깊은 산골 오막살이”나 “바닷가”에까지 땡땡땡 울렸을 탄일종 소리는 더욱 애절했을 것이다.

호위(護衛)란 보호하고 지킨다는 뜻이다. 가호(加護)는 그 호위에 신의 힘을 빌릴 때 사용한다. “메리-크리스마스!”는 호위나 가호라는 말과 찰떡궁합이다. 그러니 고단하고 외롭고 쓸쓸한 이웃에게도, 소중한 생명을 부여받은 모든 존재에게도 사랑과 감사와 축복의 가호가 땡땡땡 탄일종 소리와 함께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 우크라이나나 가자지구에도, 기아와 난민으로 고통받는 나라에도, 일촉즉발 대치 중인 우리의 휴전선에도, 총선을 앞두고 날 선 칼을 휘두르는 정치권에도 용서와 화해와 평화를 호위하는 파람파팜팜의 북소리가 높이 울렸으면 더욱 좋겠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