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정치에도 좋은 정책은 가능한가 [아침햇발]

이창곤 2023. 12. 24.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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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지난 20일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2023 서울 국제 안심소득 포럼에서 2019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에스테르 뒤플로 매사추세츠공과대(MIT) 교수가 오세훈 서울시장과 특별대담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창곤 |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크리스마스를 맞아 저마다 들뜬 시간을 보낼 때다. 하지만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에겐 유독 힘든 시간이 요즘이다. 누군가에게는 소담스러울 흰 눈조차 이들에겐 그저 한파의 고통을 더하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정치와 정책은 한 사회의 가장 취약한 이들을 먼저 살피고 모두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노벨상 수상자인 에스테르 뒤플로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정책과 정치의 중요성을 설파해온 경제학자다. 최근 서울시가 연 국제포럼 참가차 한국을 찾은 그는 이 포럼의 기조강연에서도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돌봐주는 것은 사회의 도덕적 의무이자, 정책적으로 굉장히 시급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그 이유로 그는 인공지능(AI) 시대의 도래로 인한 일자리 상실과 불평등의 심화 등을 들며, 이제 “사회보장제도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굳이 그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국내에서도 부실하고 불충분하고 때로는 역진적인 한국 사회보장제도의 틀을 획기적으로 손봐야 한다는 이른바 ‘사회보장제도의 재구조화’의 목소리가 나온 것 또한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런 목소리는 수시로 반복되지만, 좀체 정책 혁신과 제도 개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가난을 증명할 수 없어 생계·의료급여를 받지 못한 ‘비수급 빈곤층’이 66만명(2021년 기준)에 이르지만, 정부는 기존 제도를 땜질할 뿐이고, 정치권에서는 그 어떤 의미 있는 정책 논쟁조차 없는 ‘정책 실종의 정치’가 길게 이어지고 있다.

2022년 대선에서도 그랬고, 2024년 총선이 다가와도 정책 부재의 정치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나마 가물에 콩 나듯 정당들이 내놓은 정책은 어떤 사회적 논의 과정이나 검증 없이 불쑥 내던지는 ‘떴다방 정치’의 ‘아니면 말고 식의 제안’이다. 정책정치의 빈자리에는 정당 간의 대립과 증오, 내부의 권력다툼만이 난무한다. 정치가 이러한데, 행정부의 정책 혁신을 기대한다는 것은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찾는 일이나 진배없다.

“나쁜 정치와 정책이 만연한 격동의 시대”에 뒤플로 교수의 미덕은 한국 정치처럼 아무리 “정치 환경이 나빠도 좋은 정책을 실행할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점이다. 물론 그는 “정치 환경이 좋아도 나쁜 정책을 실행할 수 있다”는 점도 인정한다. 그가 진정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주변부로부터의 작은 변화’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개선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정치는 정책을 규정하는 유일한 요인은 아니”기에 “가능성이 작더라도 시도해봐야 하는 것”이며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제도와 기능을 향상할 여지는 충분히 있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이는 역대 한국 정부의 정치와 정책에서도 흔치 않지만 부분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뒤플로 교수의 이런 태도는 실상 지난 20년 동안 40여 빈곤국에서 보편적인 기본소득에서 선별적 소득지원까지 빈곤 해결을 위해 직접 발로 뛰면서 실험하고 연구한 직접 체험에서 비롯하기에 울림이 있다. 이념과 정치적 선입견을 앞세우기보다 각 나라의 상황에 부합해 어떤 고양이든 쥐만 잘 잡게 하자는 실용적 접근이다. 그가 서울시의 안심소득 정책실험을 눈여겨보는 데는 아마 이런 맥락도 있지 않을까 싶다.

안심소득은 중위소득 85% 이하, 재산 3억2600만원 이하 저소득 가구에 2025년 6월까지 3년간 이뤄지는 정책실험이다. 중위소득과 가구소득 간 차액의 절반을 지원하는 것을 뼈대로 한 ‘하후상박형 빈곤층 소득보장 정책’이다. 기초생활보장제도와 근로장려세제 등 기존 제도를 대체하거나, 보편적 소득보장제도에 대한 우위성을 논하기는 아직은 턱없이 섣부르고, 무엇보다 시민단체의 ‘오세훈 서울시정’에 대한 거센 비판이 있지만, 적어도 이 정책실험만은 평가할 여지가 있다.

실상 근년 들어 중앙 정치 무대와 달리, 지방정부가 전개하는 주목할 정책(실험)이 적잖다. 예컨대, 중앙정부의 돌봄 정책의 빈틈을 메꾸는 ‘틈새 돌봄 서비스’가 특히 그러한데, 사각지대를 없애겠다며 지난해 1월부터 시작한 ‘광주다움 통합돌봄’, 내년 1월부터 시행 예정인 경기도민이라면 누구나 생활돌봄과 방문의료 등을 받을 수 있다는 ‘360도 돌봄’이 대표적이다.

일련의 정책(실험)이 가난한 이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개선하고, 비록 사회보장제도의 거시적 틀을 바꾸지는 못해도 이를 촉진하게 하는 작은 밑거름이라도 될 수 있지는 않을까, 기대, 아니 상상해본다.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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