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시평] 스크루지가 말했다 "사기 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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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 사기 치고 있네(Bah, Humbug!)" '쥐어짜고 비틀고 긁어모으고 움켜잡는 탐욕스럽고 죄 많은 영감' 에비니저 스크루지가 내뱉는다.
찰스 디킨스는 '크리스마스 캐럴'의 반영웅이 불신과 경멸을 입에 달고 살게 했다.
여전히 스크루지처럼 "사기 치고 있네"를 입에 달고 사는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을까.
스크루지의 조카는 "모두 꽉 닫힌 마음을 활짝 열고 자기 아랫사람도 똑같이 무덤을 향해 가는 여행의 동반자로 생각하는" 절기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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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디킨스의 반영웅
말끝마다 불신이 묻어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신뢰자본은 바닥 아닌가
"치, 사기 치고 있네(Bah, Humbug!)" '쥐어짜고 비틀고 긁어모으고 움켜잡는 탐욕스럽고 죄 많은 영감' 에비니저 스크루지가 내뱉는다. 찰스 디킨스는 '크리스마스 캐럴'의 반영웅이 불신과 경멸을 입에 달고 살게 했다. 친절과 나눔의 절기를 말하는 조카에게도, 옛 동업자 유령을 볼 때도 "사기"가 튀어나왔다. 짧은 소설에서 아홉 번이나 나오는 말이다. 정치판을 취재했던 디킨스는 그 단어의 쓰임새를 잘 알았다. 그는 19세기 자본주의를 호흡했다. 역사가 토머스 칼라일의 말대로 '돈을 벌지 못한다는 공포가 지옥이 되는' 시대였다.
디킨스는 열두 살 때 학업을 그만두고 구두약 공장에서 상표를 붙였다. 아버지는 채무자 감옥에 갇혔다. 학교와 광산에서 굶주리고 못 배운 아이들을 본 그는 사회 비판 팸플릿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대중소설이 몇만 배 파급력이 있으리라고 봤다. 소설에서는 빅토리아 시대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읽을 수 있다(아이들은 '결핍'과 '무지'라는 유령으로 나온다). 카를 마르크스는 디킨스가 자신의 혁명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하지만 디킨스의 해법은 혁명이 아니었다.
1843년 이맘때 나온 '크리스마스 캐럴'은 5실링에 팔렸다. 얼음장 같은 스크루지 밑에서 떨면서 일하는 사무원은 주급 15실링으로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했다. 베스트셀러를 낸 디킨스는 열 명의 자녀를 키우는 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당시 사회는 토머스 맬서스가 말한 빈곤의 덫을 벗어나지 못했다. 기술 진보의 열매는 늘어나는 인구가 다 먹어치울 것이었다. 구빈원에 가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이들에게 스크루지는 말한다. "그러는 게 좋을 거요. 잉여인구도 줄이게."
디킨스와 마르크스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인류는 마침내 맬서스의 덫에서 벗어났다. 기술 진보로 성장은 폭발했다. 앵거스 매디슨의 추산에 따르면 스크루지의 시대 이후 영국인들의 구매력(1인당 실질 GDP)은 약 10배 늘어났다. 한국인들의 구매력은 50배 가까이 늘었다. 그런 나라가 인구 감소 걱정을 하게 될지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 디킨스가 지금의 기술을 보면 속임수라고 할지 모르겠다. 스크루지가 본 환영까지 만들어낼 수 있을 테니까.
달라지지 않은 것도 있다. 디킨스가 180년을 건너뛰어 오늘을 살아가는 인물을 창조한다고 해보자. 여전히 스크루지처럼 "사기 치고 있네"를 입에 달고 사는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깜짝 놀랄 만큼 부유해졌어도 불신과 경멸은 여전하다. 지구촌에서 가장 빨리 부를 축적한 한국인들이 특히 그렇다. 통계가 말해준다. 조사업체 입소스는 올여름 31개국에서 18개 직업군의 신뢰도를 조사했다. 한국의 전반적인 신뢰 수준은 27위였다. 거의 모든 나라에서 정치인을 가장 불신하고 의사를 가장 신뢰했다. 한국에서 정치인을 믿는다는 응답은 8%에 불과했다. 아르헨티나, 헝가리, 폴란드와 함께 최하위권이었다. 의사를 믿는다는 응답은 38%로 최하위였다. 2020년 퓨리서치센터는 14개 선진국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대부분 사람을 믿을 수 있다'고 답한 한국인은 57%로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에 이어 뒤에서 네 번째였다. 18~29세 젊은 층은 45%만 사람들을 믿을 수 있다고 했다. 불신은 저학력·저소득층에서 훨씬 컸다. 우리는 공부를 가장 잘한 집단과 사회를 이끌어가는 집단일수록 더 못 미더워한다. 세대와 계층 간 불신의 골은 너무 깊다. 총선의 계절에 그 골은 더 깊어질 것이다.
스크루지의 조카는 "모두 꽉 닫힌 마음을 활짝 열고 자기 아랫사람도 똑같이 무덤을 향해 가는 여행의 동반자로 생각하는" 절기를 말했다. 이 겨울 우리 안의 스크루지는 뭐라고 답할까.
[장경덕 작가·전 매일경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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